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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국제

日우익 '식민지배가 韓발전에 기여' 저서 낙성대硏 창립자 포상

by 체커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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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저서..일제의 가해 책임 부인에 이용

이대근 성대 명예교수 저작 '귀속재산연구' [아마존 킨들 실행 화면 촬영, 재판매 및 DB 금지]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우익 사관을 추종하는 일본 단체 국가기본문제연구소가 '귀속재산연구 - 한국에 묻힌 일본 자산의 진실'(이하 귀속재산연구) 저자인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제9회 일본연구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산케이신문이 15일 전했다.

이 명예교수는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머물던 일본인이 가지고 있다가 광복 후 미군정을 거쳐 한국 측으로 이관된 이른바 '귀속재산'(적산)을 연구한 학자다.

귀속재산연구는 일본 대장성과 미군 사령부의 합동 조사 결과를 근거로 1945년 8월에 일본이 조선에 둔 총재산의 평가액을 52억4천600만달러로 추정했다.

한반도의 귀속재산이 패전으로 인해 일본이 만주, 대만 등 모든 해외 식민지나 점령지에 둔 총재산의 24%를 차지했다는 분석이다.

이 책에는 식민지 지배가 한국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의 주장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식민지 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광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행했다는 점에서 어느 나라의 식민지 지배와도 완전히 구별되는 특수한 공업화를 거쳤다"면서 "식민지사회의 경제 발전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기술했다.

와타나베 도시오 국가기본문제연구소 이사는 "1930년대에 한국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 제1차 산업혁명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도상국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며 이 명예교수의 저서가 "이런 사실을 1차 자료를 세밀하게 분석해 입증한 세기의 저작"이라고 심사 의견을 밝혔다.

이 명예교수는 이영훈·김낙년·이우연·주익종 등 '반일종족주의'의 주요 저자가 속한 의 공동 창립자다.

최근 한일 양국이 역사 문제로 대립하는 가운데 일본 우익 단체나 미디어는 한국 학자들이 쓴 논쟁적인 저작물을 부각하며 일제 강점기 가해 행위에 관한 일본 측의 책임을 부인하려고 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이 명예교수의 저서를 소개하며 "한반도에 방대한 자산을 남겼음에도 아직도 한국 측의 보상 요구가 이어지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 본서가 말하는 역사적 사실을 한국 측에 들이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작년에는 우익 논객으로 활동하는 니시오카 쓰토무 씨의 저서 '날조된 징용공 문제'를 한국어판으로 번역한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등에게 특별상을 줬다.

우익 논객 사쿠라이 요시코가 이사장을 맡는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에서 '성노예'라는 표현을 삭제하라고 요구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사죄한 일본 고노담화가 "위안부가 강제연행됐다는 오해를 확산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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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익단체가.. 한국의 친일사관 관련 책을 쓴 사람에게 상을 줬네요..

 

일본 단체 국가기본문제연구소가 '귀속재산연구 - 한국에 묻힌 일본 자산의 진실'(이하 귀속재산연구) 저자인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제9회 일본연구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일본 언론사가 보도했습니다. 산케이신문이라고 일본 보수언론사 말이죠..

 

이 책에는 식민지 지배가 한국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의 주장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일본 우익에서 한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책임없다는 근거로 활용되는 군요..

 

글쎄요..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광공업.. 철도.. 도로를 건설한건 맞죠.. 그런데 그건 일본의 전쟁을 위한 기지화에 따른 것이지 한반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한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광복직후.. 북한이 한국보다 소득이 높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겁니다. 특히 중공업화 수준이 월등했죠..

 

왜냐..

 

북한 지역의 천연자원이 많았고.. 이를 캐내어 자원으로 쓰는 공장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 자원을 통해 일본의 배를 불리고.. 전쟁물자를 보충했고요.. 이후 광복후에는 북한에 도움이 되었지... 정작 한국에는 도움이 되진 못했습니다. 38도선 아래 남한 지역에는 남아있는게 별로 없었으니까요..

 

거기다..일제식민시절에는 일본이 조선내에서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조선인들을 채용했지만..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중요 요직에는 조선인은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복 후 일본에 유학을 간 이들이나 기술을 배웠었기에.. 광복후에는 이들이 중심으로 기업이 설립되고 배를 불려 나갔죠.. 그러다 박정희 정권의 지원에 더더욱 발전을 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했었고요..

 

중공업의 중심이라 하는 철강의 예를 들어보면 정작 광복 후에 발전한게 아닌...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박정희 정권때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일본에 보상금과 차관을 들여와 박태준씨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 건립을 지시를 하고.. 박태준씨는 일본 제철소에 방문해서 같이 간 제철 기술자들과 같이 기술을 배워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포항종합제철을 설립하여 중공업 시대를 연 것이지... 일본이 조선에 만들어놓은 공장등으로 중공업이 발달한게 아닙니다. 그때 일본에선 제대로 모든 제철기술을 알려주지도 않았었습니다.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한국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철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와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

즉.. 현재의 한국이 된건.. 광복이후..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물려준게 아님에도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이들이 남아 있고.. 저렇게 책까지 써서 결국 일본이 써먹게 근거를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으니.. 아직도 일본이 뻔뻔하게 한국에 대해 진정한 사과도 없이 비아냥 거리는 것 아닐까 싶죠. 그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를 만들어주는 한국인에 대해 대놓고 상까지 주니 말이죠..

 

보수진영에서도 북한에 대해 인정하는게 딱하나 있습니다. 일본에게 협조한 이들.. 친일 인사들을 모두 청산한 것 말이죠..

 

한국도 할려다 결국 이승만 정권에 의해 막혔죠.. 그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과연 청산이 될까 싶군요..

 

낙성대경제연구소... 친일우익 연구소로 많은 이들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링크 : 낙성대경제연구소(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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