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도 도둑을 맞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자신에게 소송이 제기된 사실도 모른 채, 소송이 끝나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KBS는 어제(2일) 아내가 이혼 소송을 내 남편이 모르는 사이 이혼 선고 판결까지 받아버린 황당한 사건을 추적해 보도했는데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원고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이론상으론 언제든지 가능한 게 판결 도둑질입니다. 이렇게 나버린 판결을 법조계에선 '편취판결(騙取判決)'이라고 부르는데요. 당사자가 악의 또는 불법한 수단으로 상대방이나 법원을 속여 부당한 내용으로 받아낸 판결을 말합니다.
■ ‘판결 도둑질’…대부분 송달제도 악용한 꼼수
사건의 이해를 위해 현행법상의 소송제도를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 원고가 보낸 소장은 법원을 거쳐 피고에게 배달(송달)됩니다. 피고가 이 서류를 '받는' 순간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요, 반대로 말하면 '원고가 보낸 서류를 피고가 받지 못하면' 재판이 시작되질 않습니다. 피고의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섭니다.
대부분 판결 도둑질은 피고가 서류를 못 받았음에도 받은 것처럼 꾸미려는, 즉 피고 몰래 소송을 진행하려는 원고의 '꼼수'에서 비롯됩니다.
KBS가 보도한 이혼 소송 사건의 전말은 이랬습니다.
아내는 지난해 7월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서, 남편이 소장 등 서류를 송달받을 주소를 부부가 함께 살고 있던 집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혼소송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송인 이상, 일반적인 등기우편과 달리 부부가 함께 살고 있더라도 남편이 받아야 할 소송 서류를 아내가 받을 순 없습니다. 소송서류는 둘이 살던 집으로 한 번 배달됐고, 아내가 남편 대신 서류를 받을 수 없었기에 반송됩니다.
이후 아내는 남편이 소송서류를 받을 주소를 경북 상주의 한 빌라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누군가가 이 서류를 '남편의 조카'라면서, 남편 대신 수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집배원은 본래 서류를 받아야 할 남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지는 시간이 지나 불명확합니다. 우정사업본부의 송달 관련 자료는 1년간만 보관됩니다.
법원은 서류가 남편에게 송달된 것으로 알고 재판을 시작했고, 당연히 서류가 자신에게 온 사실을 몰랐던 남편은 진행되는 재판에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법원은 민사소송법상 의제자백(擬制自白·변론기일 등에 출석하지 않아 상대방이 주장하는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간주)으로 보고 원고 주장을 모두 인정, 재판을 끝냅니다. 이에 따라 남편은 모르는 채 친권과 양육권 모두 아내 몫이 돼버렸습니다. 판결문도 당연히 소장이 송달된 경북 상주의 빌라로 날아갔습니다.
아기와 함께 잠적한 아내를 찾아 헤매던 남편은 지쳐 결국 지난해 말 이혼 소송을 제기하려 변호사를 찾습니다. 딸을 찾아오기 위해서였는데요. 이때 남편은 불과 일주일 전, 자신에 대한 이혼소송 판결이 선고까지 난 걸 알게 됩니다. 놀란 남편은 얼른 항소를 했고 이 사건은 지금도 대구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입니다.
■ 피고 주소 아무데나 적고 제3자가 피고인 척 출석하기도
위와 같이 피고 주소를 허위로 적은 다음, 누군가가 서류를 받게 해 피고가 답변서를 제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원고가 승소하게 되는 건 매우 희귀하긴 하지만 판결 도둑질의 한 유형입니다. 특히 가사소송 영역에서는 KBS가 보도한 소송의 경우 판결 편취가 발생한 사실이 사상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된 사례일 정도입니다.
민사사건의 영역에서 그나마 보도된 유사 사건을 찾아보면 14년 전인 2005년에 대법원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원고가 보낸 소장을 피고 대신 누군가가 받은 후 재판에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재판이 끝나 판결문도 허위 주소로 송달된 사례였습니다.
이 외에도 판결 도둑질의 유형을 소개드리면, 가장 많은 유형이 피고 주소를 '아무렇게나' 적는 겁니다. 피고 주소를 알고 있음에도 '주소불명'으로 적거나 해서, 소장이 피고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법원은 피고의 대응이 없으니 원고가 이겼다고 보고, 판결문을 '공시송달' 하게 되는데요.
공시송달이란 피고의 주소 또는 근무장소를 알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피고에게 통상의 방법으로 서류를 송달할 수 없을 경우, 원고 신청 또는 법원이 직권으로 법원사무관 등이 송달할 서류를 보관하는 배달 방식입니다. 나중에 피고가 법원에 오면 보라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 때문에 피고가 자신에게 소송이 제기됐고, 판결이 났다는 사실까지 알기엔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죠.
또 다른 경우는 아예 피고가 재판에 출석한 것처럼 누군가를 대신 출석시키는 간 큰 방법입니다. 형사소송법상 법률용어로는 성명모용(姓名冒用)이라고도 합니다. 피고가 "원고 주장을 인정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만큼 확실한 승소는 없겠죠. 이에 착안해 누군가를 피고인 것처럼 꾸며 출석시키고, 횡설수설하게 해 승소 판결을 받아내는 식입니다.
■ 당하면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나요?
중요한 건 이처럼 남이 허위로 내게 승소했다면 어떻게 구제받을지 그 방법일 겁니다.
민사소송 1심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원칙적으로 피고가 패소할 경우 판결문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2주(14일) 이내에 항소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항소기간, 상소기간은 불변기간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을 넘기면 판결이 확정돼 버려 원칙적으로 불복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앞서 보셨듯이 당사자가 소송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판결이 나오는 '판결 도둑질'처럼, 당사자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위와 같은 불변기간을 준수하지 못하는 경우에까지 판결이 확정된다면 피고에겐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민사소송법 제173조는 “당사자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말미암아 불변기간을 지킬 수 없었던 경우에는 그 사유가 없어진 날부터 2주 이내에 게을리한 소송행위를 보완할 수 있다. 다만, 그 사유가 없어질 당시 외국에 있던 당사자에 대하여는 이 기간을 30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 피고가 주소를 허위로 써내 공시송달로 판결이 난 경우
소송 시작부터 피고에게 소장 송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피고가 소송이 진행된 사실조차 모른 채 재판이 공시송달로 끝났다면, 판결문의 송달 역시 공시송달로 될 것이고, 패소한 피고 당사자는 자신이 패소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어 당연히 14일의 항소기간을 준수할 수 없겠지요.
이런 경우 항소기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판결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2주일 내에 항소를 하면 됩니다. 2심부터 다툴 수가 있는 것으로, 법률용어로는 이를 '추완항소(追完抗訴)'라고 합니다.
2) 누군가 피고 대신 출석해 판결을 받아낸 경우
대법원은 이렇게 확정까지 돼버린 사건의 경우 피고가 재심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경우 1심부터 재판을 다시 하게 됩니다.
3) 원고가 누군가가 피고 대신 서류를 받게 해 승소한 경우
허위주소로 소송서류가 송달돼 피고가 아닌 사람이 서류를 받아 형식으로 원고 승소 1심 판결이 선고되고, 판결문 역시 허위주소로 보내져 송달된 것으로 처리됐을 경우에도 대법원은 피고가 항소를 통해 다툴 수 있다고 봅니다.
대법원은 이런 경우 1심의 판결문이 피고에게 적법하게 송달됐다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피고는 여전히 1심 판결문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판결문을 받아야만 시작되는 항소기간이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항소를 즉시 제기하면 됩니다. 아쉬운 건 2심부터 다툴 수 있다는 점인데요. 1심부터 재심을 받으면 좋겠지만 판례는 재심이 불가능하단 입장입니다.
황당한 일이죠.. 자신도 모르는 새 재판이 시작되었고 자신도 모르는새 재판에 패소하였다는걸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편하게 자신에게 재판이 걸려 있거나 하는 사항에 대해 조회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행히도 법원에선 자신도 모르게 시작되고 끝난 재판에 대해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제책을 만들어 놨습니다. 만약 구제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악용당해 피해를 봤을지 끔찍하네요..
물론 애초 상대방을 속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도둑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사회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 씁쓸하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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