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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국제

"한국인 차별 없었다"..日군함도 원주민들 유엔서 주장

by 체커 2019.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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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자 이우연 "조선인 임금 높아..노예노동 아니야"

 

【서울=뉴시스】김혜경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석탄 채굴에 동원됐던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섬의 옛 주민들이 국제무대에서 "당시 군함도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3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군함도의 옛 섬 주민 등은 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심포지엄을 열고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심포지엄은 일본의 민간단체 ‘국제역사론전연구소’가 주최했다.

전 군함도 주민인 사카모토 도토쿠(坂本道徳·65)는 광부였던 부친과 전 주민들의 증언이라며, "한반도 출신자도 똑같은 동료로서 함께 술을 마셨다고 들었다"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군함도가 조선인을 강제노동시킨 ‘아우슈비츠와 같은 지옥섬’이라는 오해가 세계에 퍼져, 섬의 명예가 훼손됐다"라고도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군함도 옛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동영상도 상영됐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국제역사론전연구소'의 마쓰기 구니토시(松木國俊) 수석연구원은 "일본 정부가 조선인에게 노예노동을 시켰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왜곡된 반일 프로파간다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한국의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도 참석해 일본 측 주장에 힘을 보탰다. 이 연구원은 당시 군함도 탄광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임금에 대해 "다른 직종의 조선인 및 일본인에 비해 높았다", 탄광에서의 노동 강도에 대해 "노예노동이라는 왜곡된 역사인식이 확산돼 있다"라는 등의 주장을 폈다.

낙성대 경제연구소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덕분에 근대화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를 이끌어온 곳으로, 이우연 연구위원은 이전부터 '징용', '강제동원'이라는 용어가 역사왜곡이라는 논지를 전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군함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리는 하시마섬은 나가사키현 인근 해역에 위치한 축구장 2개만한 크기의 인공 섬으로, 2015년 하시마섬을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시설 23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러나 이 섬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석탄 노동에 동원됐던 곳으로, 일본은 유네스코 측에 메이지 산업시설 23곳 중 7곳에서 조선인들이 강제징용(forced to work)을 당했다는 설명 문구를 추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정부는 강제 노동(forced labor)의 의미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며 강제징용 사실을 명기하지 않고 있다.

chkim@newsis.com


 

일본 옛 군함도 일본인 주민들이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심포지엄을 열고 "당시 군함도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합니다.

 

그동안 한국내 군함도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는데 그건 싹 무시하고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인이니 자국에 유리한 발언을 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곳에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참석해서 논란입니다. 이우연 연구위원으로 일본의 식민지화 때문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이전부터 징용과 강제동원이라는 용어가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을 하는 인사라 합니다. 징용과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죠..


관련뉴스 : 이 판국에… “일제 노무동원 강제 아니었다” 논문 논란

 

[단독] 이 판국에… “일제 노무동원 강제 아니었다” 논문 논란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조선인 모집 노무동원이 강제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발표됐다. 일본의 탄광 등 노동현장에서 민족차별이 없었다는 내용도 포

news.kmib.co.kr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기 하루 전인 지난 27일 ‘전시기 일본의 조선인 노무동원과 탄광의 노동환경’이라는 논문을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1987년 설립된 낙성대연구소는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연구로 뉴라이트 사관(史觀)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연구원은 논문에서 조선인 탄광노동자들이 강제로 연행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전시 이전 다수의 조선인 청장년층이 모집 방식을 거쳐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전시에도 일본행을 택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연구원은 “일부 선행연구는 ‘논밭에 트럭을 대고 일을 하는 농부나 행인을 무차별 연행하고 깊은 밤에 침실로 들이닥쳐 무력으로 연행했다’고 주장하지만…(중략)…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동원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논문에 썼다.

탄광 현장에서 민족차별도 없었다고 봤다. 위험하고 열악했던 갱도 내부에 근무한 조선인 비중은 92.3%로 일본인(59.8%)보다 훨씬 높았다. 이 연구원은 “선행연구들은 갱내부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상을 ‘의도적 민족차별’의 결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는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의 노동공급이 일본 청년들이 빠져나간 탄광의 노동수요를 충족시킨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분석했다.

강제동원위와 학계는 일본 정부조차 인정하는 ‘강제성’을 부정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은 “군 입대와 노무동원 중 고르게 하거나 경제적인 보수를 속여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고 전시로 넘어가면서 의지대로 돌아올 수 없었으므로 강제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에대해 정혜경 강제동원위 조사1과장은 “일본 자료에 기초해 오류가 많고, 기존 연구의 일부만 발췌해 맥락과 다른 부분이 많다”며 “일본 정부조차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데려간 것’ ‘교육시켜서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착각하게 하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며 강제동원으로 규정하고 공식 인정했다”고 반박했습니다. 

 

이어 “갱내부에서도 일본인은 주로 광맥만 찾고 철수하는 선탄부나 기계 조작을 맡았지만 조선인은 굴진부에서 직접 채탄하며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다”고 덧붙였다. 라고 합니다..

 

거기다 군함도 생존자의 증언도 있습니다.


관련뉴스 : 군함도 생존자 "강제 징용자 비참한 생활 계속 알릴 것"

 

군함도 생존자 "강제 징용자 비참한 생활 계속 알릴 것"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몽둥이를 맞으며 고통스러워 하던 강제 징용자들의 비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구연철(87·부산) 씨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 현장인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에 입도한 것은 70여년 전인 1939년이다. 구씨는 군함도에 먼저 간 아버지가 불러 할머니·어머니와 함께 입도했다. 구씨의 아버지는 당시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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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둥이를 맞으며 고통스러워 하던 강제 징용자들의 비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20대 전후의 조선인 청년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관리사무소와 식당 주변에서 이들이 수시로 몽둥이 등에 맞는 장면을 목격하고 거친 비명을 거의 매일 들으며 학교와 집을 오갔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 콩깻묵 찐 것을 밥 대신 먹었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게 없어 찐 콩깻묵을 먹어야 했고 어김없이 설사가 계속됐다고 한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인들이 사는 번듯한 주거시설의 지하에 살았다. 이들의 주거공간에는 통풍이 안 돼 습기가 가득했다.


이런 생존자의 증언이 있었는데 당시 군함도 주민이라는 일본인들의 주장과 더불어 한국의 대학의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으니... 그것도 이미 반박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를 보는 한국 국민들은 얼마나 열받을지는 뻔할 것 같습니다.

 

이에대해 많은 언론매체가 팩트체크를 했었죠..

 

더욱이 영화 군함도가 상영이 되면서 한창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관련뉴스 : 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조선일보)

 

조선인 수백 명 군함도 탈출? 시도조차 못 했을 것

개봉 8일 만에 관객 510만명을 돌파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일제 말기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했던 일본 나가사키 남서쪽의 섬 하시마(端島)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45년 당시 조선인 500~800명이 이 섬의 지하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군함도'는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화는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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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과 조선인 노무자 공출'을 펴낸 강제 동원 연구자 정혜경〈사진〉 박사를 통해 궁금증을 정리했다. 정 박사는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간 조사과장으로 일했다.

①영화처럼 수백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집단 탈출했다?

[X] "징용자들은 혹사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렸고 탈출 시도가 빈번했다. 2차 대전 기간에는 도망자를 감시하기 위해 재향군인회원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 인근 섬으로 헤엄쳐 도망가다 익사한 경우도 많았고, 붙잡히면 가혹 행위가 뒤따랐다. 하지만 영화처럼 집단 탈출을 시도하거나 일본군과 무력 충돌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영화 후반부는 상상력의 산물에 가깝다."

 

②군함도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만 있었다?

[X] "강제징용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보면, 영화 '군함도'의 배경인 하시마 탄광에는 조선인 500~800명 외에도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 1944년 6월 중국인 노동자 205명이 하시마 탄광에 들어왔고, 이듬해 8월까지 15명이 숨졌다는 현지 광업소 기록도 있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하시마 탄광에 중국인뿐 아니라 미군 포로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③'군함도'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X]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된 건 1810년쯤이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됐다.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지만 해저 1000m의 석탄을 캐내는 '심해(深海) 탄광'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노동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도 악명 높았다. 이 때문에 1920년대부터 하시마는 '군함도'와 '감옥섬'으로 불렸다."

④조선인 징용자들은 임금 착취에도 시달렸다?

[O]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인적·물적·자금의 삼중(三重) 착취 구조를 만들었다. 강제 동원 과정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은 기차 삯과 뱃삯, 밥값까지 빚을 짊어졌다. 작업장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은 숙박비와 식비는 물론, 신발과 곡괭이, 이불에도 사용료를 매겼다. 이 빚은 1년 이상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었다. 쥐꼬리만 한 임금은 우편 저금이나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착취당했다. 미수금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는 수단이기도 했다. 사실상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었다."


이우연 연구위원이 당시 조선인의 임금이 높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임금이 일본에서 저런식으로 착취를 당했었다는 건 언급이 없습니다.

 

많이 받으면 뭘하겠습니까.. 그만큼.. 아니 그것보다도 더 많이 착취를 당했는데요...

 

일본인들이 주장하면 열은 받지만 자기 나라를 변호하는 것이니 주장하는 것은 이해라도 하겠지만 피해국의 사람이 저리 말하니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후손이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왜곡된 주장을 한 대학교의 연구소 연구위원이 주장하고 있으니 일본으로선 신나라..하며 한국 연구위원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참 답답하긴 합니다.. 언제쯤 일제 잔재를 청산할 수 있을련지.... 이런 잔재가 있으니 여지껏 일본에 제대로 큰소리도 못하고 있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일제 식민지 시절에 조선인을 핍박한건 일본인보단 일제 앞잡이로 내세워진 조선인에게 핍박받은 게 더 많았죠..

 

그 친일 경찰이 광복 후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이근안 같은 고문기술자를 살린 결과로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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