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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이 폭로될 때마다 한국 사회는 들끓었다. 이때마다 ‘갑’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지만 잠시뿐이었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갑들도 갑질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에 적응하고 내성을 기른 것이다. 이 때문인지 갑들이 갑질 사태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판박이처럼 닮았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서둘러 대국민 사과를 한다. 각종 위법 논란이 솜방망이 처분으로 마무리되는 동안 숨어지내다 슬그머니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 불매운동이 벌어질 경우 우선 경영 악화를 빌미로 구조조정을 벌여 손해를 메운다. 안 되겠다 싶으면 회사 이름은 숨기고 새 브랜드를 출시해 이미지를 ‘세탁’한다. 잃어버린 시장점유율은 나중에 할인행사를 벌여 되찾으면 된다. 갑이 가진 돈은 그 어떤 사과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갑의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갑은 잠시 잊혀질 뿐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갑질 대응의 ‘교본’이 된 피죤 1978년 창사 이래 피죤은 30년 넘게 업계 1위 기업이었다. 2011년 이윤재 회장(84)의 청부폭행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빨래엔 피죤’이었다. 이 회장은 지역 폭력조직에 3억원을 주고 자신의 비리의혹을 제기한 이은욱 전 피죤 사장을 폭행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실형을 살았다. 회사 이미지는 추락했고 소비자들은 피죤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피죤의 매출은 2009년 1600억원에서 2012년 900억원대로 떨여졌다.
오너리스크는 계속됐다. 2012년 이 회장은 회삿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50%에 달했던 피죤의 시장점유율은 20%대로 내려앉았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 회장은 법원에 선처를 호소하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했다.
이 회장의 약속은 2012년 8월 가석방 이후 그가 회사로 출근하면서 식언으로 드러났다. 2013년 9월이 되자 이 회장은 대놓고 경영 복귀를 선언한다. 취임한 지 9개월밖에 안 됐던 조원익 당시 피죤 사장은 해임됐다. 이 회장은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매출부진과 경영쇄신을 내걸고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회사에 피해를 입힌 건 이 회장 본인인데, 애꿎은 직원들이 그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구조조정은 가혹했다. 직원들이 스스로 떠나도록 연고도 없는 지방에 인사발령을 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했다. 그러자 사측은 조합원들이 근무하던 지방 영업점을 폐쇄했다. 남아있는 근로자들의 처우도 악화됐다. 최근 7년 동안 임금은 단 한 번도 인상되지 않았다.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7년 연속 임금이 줄어든 셈이다.
동력을 잃은 노조는 와해됐다. 조합원 50여명으로 출범한 노동조합은 노조원들이 모두 회사를 나가면서 노조위원장 단 한 명만 남았다. 김현승 전국화학섬유산업노동조합 피죤지회 지회장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내보내고 노조에 가입하면 어떻게든 내보낸다”며 “현재 90명의 직원이 남았는데 이들 중 70%가 1~2년차로 이뤄졌을 정도로 인력구조도 기형적이다”라고 말했다.
2016년 피죤은 회사 이미지 개선을 위해 기업 브랜드를 교체했다. 효과가 있었다. 불매운동은 잠잠해졌고 온라인 시장 확대 전략까지 성공을 거두면서 영업이익과 점유율은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2015년 5800만원 영업적자를 기록했던 피죤은 2016년 흑자 전환에 성공한 뒤 지난해 76억5000만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적자를 모면한 이 회장 등 사주 일가는 최근 2년간 55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2년 연속 대한민국 최고의 경영대상을 수상한 이 회장은 올해 ‘한국의 영향력 있는 CEO’로 선정됐다.
2014년 전국화학섬유산업노동조합 피죤지회 노조원들이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집회를 갖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남양의 브랜드 이름 지우기 ‘꼼수’ 2013년 갑질·밀어내기(강매) 파문을 일으킨 남양유업 역시 기업 이미지 추락과 함께 소비자 불매운동이라는 역풍을 만났다. 2012년까지 연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던 남양은 2013년과 2014년 연속 적자를 냈다. 이듬해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영업이익률은 0~2% 수준에 마물러 있다.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에 따른 결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업계에서는 국내 출산율 하락과 남양의 해외시장 개척 실패를 매출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분석한다. 실제 우유의 경우 대체재가 많아 불매운동의 주요 대상 품목으로 꼽히는데 남양의 우유 매출은 2013년 5925억원에서 지난해 5840억원으로 소폭 하락하는 데 그쳤다.
남양유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 적극 대응했다. ‘이름 지우기’가 남양의 대표 전략이다. 남양유업에서 운영하는 디저트 카페 백미당은 ‘남양’을 감춘 대표적인 브랜드다. 지난 2014년 첫 개점 이래 현재 국내 70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 중인 남양의 효자 브랜드로 공식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 등 공식 SNS 계정 모두 기업명 ‘남양’을 노출하지 않고 있다. 남양의 자사 커피 브랜드 ‘루카스나인’과 ‘프렌치카페’ 역시 별도의 SNS 계정을 운영한다. 올해 공개한 ‘맛있는우유GT 슈퍼밀크’ TV 광고에서도 남양은 기업명을 넣지 않았다.
남양의 이름 지우기 꼼수에 소비자들도 이른바 ‘숨은 남양찾기’를 통해 맞서고 있다. 대형마트의 PB상품을 포함해 남양이 위탁생산하는 제품명을 찾아내 소비자들끼리 공유한다. 예컨대 남양유업에서 공급하는 원유가 재료로 들어가는 음료나 유제품 등을 찾아내 해당 제품을 불매하는 방식이다.
불매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들이 있기는 해도 수년 전의 갑질 사태 초기와 비교하면 불매운동의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 한때 남양 불매운동에 동참했던 편의점 가맹점주들도 불매운동을 철회했다. 최종열 CU 가맹점주협의회장은 “유제품 점유율이 높은 남양 제품이 빠지면 실질적으로 편의점 영업이 어렵다”며 “당시 불매운동에 참여한 편의점도 제각각이었고 참여한 점주들도 잠깐 동참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소비자 보이콧>의 저자 서정희 울산대 아동가정복지학과 교수는 “시간이 지나면 불매운동 열기는 식게 마련”이라며 “기업명을 숨기는 남양의 전략도 일부 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갑질 사태를 계기로 남양의 기업문화나 경영방식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남양은 밀어내기·욕설 사태 이후 대리점과 상생을 다짐했지만 최근 대리점들이 제품 판매를 통해 가져가는 수익 일부를 일방적으로 삭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또다시 갑질 논란에 빠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남양유업의 불공정행위 여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2002년부터 남양과 거래를 해온 대리점주는 “남양은 달라진 게 없다”며 “회사 측과 결탁한 대리점협의회 하나 만들어서 회사 이권만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남양유업은 “수수료 조정과 관련해 공정위에서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관련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갑질의 형태는 다양하다. 갑질 피해자도 가맹·유통·하도급·대리점부터 소비자와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배상 역시 제각각 이뤄져야 마땅하지만 여태껏 그러지 못했다. 갑이 저지른 죗값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따져보지 못했다. 갑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과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하도급법과 제조물책임법에 일부 도입돼 있다지만 배상을 인정받기 위한 요건이 까다로워 활성화되지 못했다. 증권분야에 한정적으로 도입된 집단소송제 역시 소송 제기 절차가 어려운 데다 높은 비용부담으로 실효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갑질 근절과 을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발의된 공정거래법과 상법 등 공정경제 관련법안 13개는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총수 일가가 임원이 되거나 이들의 보수를 책정할 때 비지배주주들의 다수결 동의를 받는 MoM(Majority of Minority Rule) 도입이 효과적인 갑질 근절방안이 될 수 있다”며 “이 제도를 통하면 자격 없는 이들이 갑의 위치에 오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갑들은 왜 변하지 않나 갑질을 법과 제도가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탓에 여태껏 법을 대신해 갑을 응징하고자 나선 당사자는 국민들이었다. 소비자 불매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불매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빨리 사그라들었고 갑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사조산업의 경우 2014년 12월 1일 회사 소속 501오룡호가 침몰하면서 전체 승선인원 60명 가운데 53명이 사망하거나 실종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악천후 속에서 무리한 조업을 벌인 게 사고의 원인이었다. 사람보다 어획량을 앞세웠다가 벌어진 비극이다. 당시 사조그룹은 오룡호 사건에 대한 늑장 대응과 수색과정에서의 무성의한 태도 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사조그룹 주진우 회장은 사건 사흘째 되는 날이 돼서야 공식 사과를 했다. 이마저도 사조 측이 유가족과 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사고가 아니었으면 오룡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막말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후에도 사조 측의 막말 논란이 이어지면서 사조 제품 불매운동이 일었다.
하지만 오룡호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빠르게 식었다. 사조 불매운동은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2015년 사조산업의 영업이익은 340억원(연결기준)으로 전년 영업이익 570억원보다 감소했지만 2016년 490억원, 지난해 590억원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사조그룹사 전체 매출규모 역시 2015년 2조5000억원에서 지난해 약 3조3900억원을 기록하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
김치호 오룡호 유가족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은 “불매운동은 사조에도 유족들에게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며 “지금도 회사는 예전 그대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조그룹은 지난 9월 직원들을 상대로 참치 선물세트 강매를 하는 한편 협력회사에도 참치캔 구매를 요구했다는 이른바 ‘참치캔 갑질’로 재차 논란을 일으켰다.
대기업의 갑질을 폭로하는 피해자를 기업이 재차 괴롭히는 ‘리벤지 갑질’도 최근 들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2일 남양유업의 불공정행위를 언론에 제보한 대리점주가 자살을 시도했다. 대리점주의 제보가 실린 언론 기사에는 남양유업 직원을 자처하는 네티즌들의 댓글과 오히려 남양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악성 댓글이 수십 개씩 달렸다. 대리점주는 악성 댓글과 ‘모르쇠’로 일관하는 남양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대기업이 갑질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직과 자본을 동원하는 것은 악질적인 행위”라며 “이른바 ‘리벤지 갑질’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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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근성이라고도 하죠.. 빨리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
피죤... 남양유업... 사조산업...
그래서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하는 갑질 전력... 하지만 과연 그들은 그 버릇을 고칠까요? 아니 갑질이라는 걸 알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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