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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정치

혁대·병상 밑에 숨겨 반출… 영문 ‘3·1 독립선언서’ 세계에 알렸다[대한외국인]

by 체커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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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美 언론인 매클래치·테일러
극동 여행 중 서울에 온 매클래치
한국인 독립 열망·일제 탄압 목격
미국서 “가장 아름다운 저항” 극찬

테일러, 매클래치에게 사본 준 듯
유언에 따라 양화진 묘원에 안장

1919년 3월 서울에 머물며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미국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미국으로 가져가 미국 매체에 전달했고 세계에 한국의 독립 열망을 알렸다. 매클래치가 쓴 3·1운동 관련 기사가 실린 1919년 4월 6일자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지면. 김도형 박사 제공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 3·1 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세계에 우리의 독립 열망을 전했다. 그러나 정작 독립선언서가 어떻게 세계 각국에 전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파 과정이 비밀스러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영문 3·1 독립선언서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1857~1938)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1875~1948)의 역할이 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새크라멘토 비’의 편집인이자 AP통신 이사였던 매클래치는 1919년 1월 부인과 극동 지역을 여행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단둥을 거쳐 3월 3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3·1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탄압을 직접 목격했고 선교사 등과 교류하며 생생한 정보를 접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누군가에게 받아 ‘돈을 넣는 혁대’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부산과 일본을 거쳐 3월 2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일본에선 ‘재팬 어드버타이저’와 AP통신 도쿄지국에 독립선언서를 넘겨줬고, 하와이에서는 지역 매체와 인터뷰를 갖고 3·1운동 소식을 전했다.

당시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한 테일러.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매클래치는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AP통신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곧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이 독립선언서 전문을 보도했다. 그는 새크라멘토 비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직접 작성한 기사로 3·1운동 목격담을 상세하게 알렸다. 그는 4월 5일자 새크라멘토 비 사설에서 3·1운동에 대해 “지금까지 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국적인 자기통제와 조직화된 수동적 저항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비폭력·평화 시위의 방식으로 만세운동을 이어 간 군중을 극찬한 것이다.

매클래치는 직접 쓴 3·1운동 관련 기사를 ‘아시아의 독일’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이후에도 언론·저술 활동과 재미 한인 교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을 지낸 김도형 박사는 18일 “매클래치는 미국에서도 저명한 언론인이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독립운동 지원에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로 자주 연락했다”며 “다만 그가 반(反)아시아·인종주의 성향이 강해 정작 한국에서 주목하지 않았고 자료도 아직 부족하다”고 서훈이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가 아시아를 비판한 것은 일본을 향한 것이었으며 일제에 맞선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지지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테일러 부부의 가옥 ‘딜쿠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김 박사는 매클래치에게 독립선언서를 넘겨준 사람이 당시 AP통신 임시 서울통신원으로 활동한 앨버트 테일러라고 보고 있다. 테일러는 1919년 고종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 등을 취재하고 보도했다. 3·1운동 당시엔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아들을 출산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는데 간호사가 병원 침상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 사본을 발견했다. 테일러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가 독립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숨겨 반출해 세계에 전할 수 있었다는 건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독립선언서가 당시 매클래치에게 전달됐을 것이라는 게 김 박사의 추론이다.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으로 추방됐다. 그들이 지낸 서울 종로구의 ‘딜쿠샤’(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는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앨버트 테일러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돼 있다.

허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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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어느 나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때... 그 국가 국민들이 식민지배를 반대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의지가 확실해야 이후 여러 이유로 식민지배가 없어졌을 때.... 그 땅의 국민들이 원래 국가로 재건하거나.. 혹은 다른 국가의 지배를 또 받는 선택의 기로에서 독립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니까요.

 

독립을 할 생각이 없다면... 식민지배를 하던 국가가 그대로 통치를 이어나가 그 국가의 영토로 확고해집니다.. OO령.. 이런 글자가 붙는 국가가 그런 국가가 아닐까 싶죠..

 

그래서 3.1절 독립선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한다는 공개적 표명이니까요.. 거기다 단순히 몇명의 선언만으로 그친게 아닌...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어... 일부의 입장이 아닌.. 그 국가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걸 식민지배를 하는 일제에게 보여준 사례죠..

 

그리고... 또하나는 이런 독립선언과... 식민지배는 불법이며 거부한다는 의지를 내부에서만 밝히는게 아닌.. 전세계에 알리는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타 국가에서도 그 국가는 원치 않는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죠..

 

일본이 패망한 뒤에... 한국이 독립국으로서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벗어난 것도.. 그런 입장을 전세계에 알렸기에 가능한 부분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위의 보도는.. 그렇게 전세계에 한국의 독립선언과 식민지배 거부를 밝히려 애쓴 사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요인중 하나가 미국입니다. 미국과 일본간 밀약 말이죠..

 

어찌되었든 한국의 독립선언문이 미국에 전문이 공개될 수 있었던건 독립선언문을 일본 몰래 미국으로 반출한 미국의 언론인 덕분이었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에 보도를 한 것이죠..

 

이를 토대로 전세계에 한국의 독립선언문이 확산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리고 그 역활을 한 미국인은 유언에 따라 한국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죠...

 

이런 노력들이 모여서 독립을 이룬 것인데... 식민지배를 한 일본이 좋다고.. 친일은 좋다고 찬양하는 이들을 보면... 위의 보도에 나온... 지금은 저승에 있는 사람은 한심해할 것 같습니다. 이럴거면 왜 그런 고생을 자처했었나 싶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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