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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사회

'위안부 매춘' 류석춘 "전태일 착취 없었다".."곡학아세 전형"

by 체커 201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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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고 통해 "전태일 6년 만에 임금 15배 상승" 주장
전태일재단 "당시 사정·노동구조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서울=뉴스1) 류석우 기자 = 최근 대학 강의에서 '위안부 매춘'발언으로 논란을 부른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번에는 한 월간지에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글을 기고, 전태일재단이 반발하고 나섰다.

전태일재단은 11일 입장문을 내고 "최근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연세대 류 교수가 월간조선에 전태일 관련 글을 썼다"며 "수치만 나열하며 이면을 보지 않고 애써 무시하는 전형적인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비판했다.

류 교수는 월간조선이 40주년 특집으로 연재하고 있는 '박정희, 오해와 진실'이라는 코너에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농촌 유휴인력을 마이카 가진 중산층으로 키워"라는 글을 기고했다.

류 교수는 해당 글에서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했다"며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라고 언급했다.

또 "'전태일 평전' 내용을 꼼꼼히 따져본 결과, 1960년대 봉제산업 노동자의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착취'라는 단어가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라고도 썼다.

전태일재단은 "먼저 류 교수는 임금의 액수만 이야기하고 실질 구매력에 대해서는 무시했다"고 반박했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임금이 10배가 올랐다고 해도 하루 일당으로 커피 10잔 값밖에 되지 않는 저임금이었다는 것이다. 재단은 "임금의 열 배를 받아도 저임금이었던 사정을 류 교수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재단은 또 류 교수가 당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진단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적게 잡아도 주당 105시간으로,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류 교수가 당시 노동자의 임금으로 다른 노동자의 월급을 주어야 했던 노동구조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당시 미싱사들은 '객공'이라는 도급제 방식으로 일했다"며 "미싱보조 등의 월급도 미싱사가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재단은 "류 교수처럼 편협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불순하게 전태일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역사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는 일"이라며 "그래도 언급을 하겠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검토와 연구를 한 뒤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비난했다.

이어 "류 교수는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며, 국민으로서는 몰역사적"이라며 "그런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고 우리 사회의 적폐"라고 덧붙였다.

sewryu@news1.kr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가.. 위안부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것에 그다지 불만족스러웠는지.. 아님 언론사의 의도에 넘어간 것인지.. 아님 그냥 별 생각 없는 건지.. 전태일을 언급하며 파문을 또 일으켰습니다.

 

논란의 중심은 조선일보 기고문입니다.

 

월간조선에서 10.26 40주년 - 박정희 오해와 진실 이라는 특집기사에 기고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당시 노동환경에서 착취는 없었고 노동자들이 적절한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했다는 주장을 담은 내용입니다.


관련링크 :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농촌 유휴인력을 마이카 가진 중산층으로 키워(월간조선)

 

1975년 정수직업훈련원을 찾아 직업훈련생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직업훈련원은 工高와 함께 기능공 양성의 중심축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착취(搾取· exploitation)’는 생산수단, 즉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만 하는 사람, 즉 노동자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의 성과를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일한 만큼 보상을 안 해주면 ‘착취’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은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자원의 상대적 희소성(稀少性) 문제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만 계급을 구분한 다음 계급 간의 영합적(零合的·zero-sum) 갈등관계, 즉 양극화(兩極化)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라 마침내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투쟁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혁명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일부 후진국에서만 발생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이론에 연연하며 착취를 정의하는 시도는 불필요하다.
 
  대신 여기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착취’에 접근하고자 한다. 만약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다시 말해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그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열악한 상황으로 치달아야 한다. 이를 계층적 기준에서 말하면 착취당하는 사람은 시간이 가면서 계층의 사다리를 내려갈 수밖에 없다. 만약 시간이 가면서 삶의 조건이 현상을 유지하든지 혹은 상대적으로 개선된다면 그는 착취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한국의 中産層은 어디서 나타났나?

 

우리나라 노동자, 특히 ‘착취’에 관한 분석은 지금까지 ‘계급’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선입견(先入見)을 따라 노동자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접근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는 전혀 괴리된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이들은 ‘기업은 성장했지만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유례없는 저임금(低賃金)에 시달리면서 자본의 착취 대상이 되어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는 계급주의적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박정희(朴正熙)가 집권한 초기의 절대빈곤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국민 대부분이 ‘마이 카’ 그리고 ‘마이 홈’을 누리는 시대를 거쳐, 이제는 휴가철이 되면 해외여행을 가느라 국제공항이 북새통이 되는 국가로 변신했다. 만약 사회의 상층 계층만이 해외여행과 같은 특전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런 모습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허리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의 중산층(中産層)이 참여하지 않고는 이런 현상이 가시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산층을 구성하는 집단은 화이트칼라로 대표되는 사무직과 관리직만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블루칼라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급여와 혜택을 누리며 중산층에 편입되어 있다. 그 결과 일부에서는 이들을 심지어 ‘노동귀족’이라고까지 부르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산업화의 주역인 노동자 집단이 어떻게 착취를 당하지 않고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는지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평전》에 나타난 전태일의 성공

 

1970년 11월 13일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초반, 즉 1960년대의 산업화는 경공업에 의해 주도되었다. 경공업 가운데서도 원단을 가공해 의복을 만드는 봉제산업이 당시를 대표하는 산업이다. 박정희 정부는 봉제품 수출을 위해 1964년 통칭 ‘구로공단’이라 불린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새로이 조성해 수많은 여성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한편 내수(內需)를 위한 봉제품 생산은 6·25전쟁 피란민이 모여 살던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역시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여성 노동자들을 당시에는 ‘여공’이라 불렀다.
 
당시 봉제산업 여공의 삶에 관한 기록은 많다. 신순애가 2014년 저술한 《열세 살 여공의 삶》, 김원이 2005년 저술한 《그녀들의 반역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모두 노동운동, 특히 ‘노동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전제로 주관적으로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기록은 당시 객관적 노동시장의 상황, 즉 일자리는 없는데 일할 사람은 넘쳐나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 또한 마찬가지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전태일, 그리고 당시 평화시장 근로자들이 겪은 삶의 조건에 독자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전태일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데 반해 그를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은 전태일 그리고 여공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경공업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는 인식을 가슴 깊이 심어준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 내용을 기초로 전태일의 경력이동과 임금상승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 다음은 《전태일 평전》을 분석한 필자의 결론이다.
 
〈16세라는 나이에 학교에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열 배나 받게 해주었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3000원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2017년 출판된 《전태일 바로보기》에 경제학자 박기성 교수가 쓴 글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근로기준법’에 제시된 다음 인용문은 착취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뒷받침한다.
 
〈전태일의 월급 2만3000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6000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당시 대한민국 평균 소득의 3배를 넘게 받던 사람이 착취를 당했다고?
 
그러나 전태일의 임금상승과 경력이동은 《전태일 평전》이 기술(記述)하고 있는 당시 평화시장의 일반적 경력이동 패턴과 비교해 매우 빠른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전태일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5년에서 2년, 그리고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태일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에서 시다에서 미싱사까지 올라가는 데 최소 4.5년, 최대 6년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승진 사다리를 전태일은 불과 2년 만에 모두 올라갔다. 물론 전태일의 아버지가 재단사였다는 가족 배경이 작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아닌 평화시장의 평범한 다른 여성 노동자들은 어땠을까? 앞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는 아무리 늦어도 최대 6년이면 시다에서 미싱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최대 2년, 그리고 다시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최대 4년이 걸린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시장 노동자, 6년이면 임금 4.7배 상승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시다로 처음 받은 월급이 1500원, 미싱보조가 되어 처음 받은 월급이 3000원, 그리고 미싱사가 되어 처음 받은 월급이 7000원이라고 각각 밝히고 있다. 물론 《전태일 평전》이 제시하는 전태일의 보수는 각각의 직책에 따른 월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아닌 다른 노동자 누구라도 그러한 직책에 따른 보수를 동일하게 받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여성 노동자 누구라도 시다로 일을 시작해 미싱보조를 거쳐 마침내 미싱사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대 6년이고, 그 기간에 월급은 1500원부터 3000원을 거쳐 7000원으로, 즉 6년 만에 임금이 4.7배 상승함을 알 수 있다. 즉 평화시장 노동자는 누구라도 6년 만에 임금이 5배 가까이 상승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누구에게도 착취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 〈그림 1〉에 이 상황이 요약되어 있다.
 
 《전태일 평전》 내용을 꼼꼼히 따져본 결과는 1960년대 봉제산업 노동자의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착취’라는 단어가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청계천 평화시장 여공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상황을 구로공단 여공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농촌의 유휴인력으로 존재하던 젊은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온갖 곡절 끝에 그들 상당수는 마침내 구로공단 혹은 평화시장에 어렵사리 취직했고, 강도 높게 일했다. 그러나 힘들게 노동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경력상승에 동반한 임금상승을 통해 시골에 있는 부모의 생활비 그리고 형제들의 학비를 대며 계층 사다리를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착취라고?
 
‘산업전사’ 혹은 ‘기능공’의 등장
 
박정희 시대의 후반부, 즉 1970년대 산업화는 중화학공업에 의해 주도되었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박정희는 철강·석유화학·조선·전자·기계(자동차 포함)·비철금속이라는 6개 업종의 산업을 일으켰다. 나아가서 그는 이 새로운 중화학공업에 종사할 노동자들을 ‘산업전사(産業戰士)’ 혹은 ‘기능공’이라 부르며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이들은 1960년대 경공업 분야의 여성 노동자, 즉 여공들과는 전혀 질이 다른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였다. 1960년대 여공들은 특별한 기술훈련을 거치지 않고 생산현장에 OJT(On the Job Training) 방식으로 바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능공들은 ‘공업고등학교’ 혹은 ‘직업훈련원’을 거치며 일정 수준의 기술을 습득해야만 생산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1973년 12월 ‘국가기술자격법’을 제정하고 엄격한 기능·기술 자격제도를 도입했다. 기능공 자격에 대한 제도의 정비와 함께 당시 양성된 기능공의 규모는 엄청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김진균 교수가 1978년 《한국 사회 인구와 발전》 제2권에 발표한 논문 〈인력개발〉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 추가로 필요한 기능공 인력이 총 134만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통로가 두 가지로 마련되었다. 하나는 ‘학교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훈련’이다.
 
학교교육은 실업계 고등학교 가운데 공업고등학교 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을 기준으로 방위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교육하는 ‘기계공고’가 시·도별로 19개, 중동 진출에 필요한 기술을 교육하는 ‘시범공고’가 시·도별로 11개, 그리고 금오공고·구미전자공고·진주건설공고·금파화학공고 등과 같은 ‘특성화 공고’가 전국적으로 12개 만들어졌다. 여기에 더해 전국에 분포한 일반 공고 55개교의 교육이 강화됐다. 그렇게 배출된 공고생이 1979년 한 해 5만명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10년이라는 시간을 대입하면 누적 공고 졸업생 수는 50만명이 된다.
 
다른 한편 직업훈련 또한 강화되었다. 군(軍)이나 정부기관 그리고 지자체 등이 운영하는 ‘공공직업훈련’과 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정부가 정한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 교육하면 공공직업훈련을 마친 것처럼 ‘인정’해주는 ‘사업 내 직업훈련’ 방식이 선택되었다.
 
공공직업훈련을 위해서는 국제원조 자금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UNDP(유엔개발계획)는 중앙직업훈련원(1968), 독일은 한독부산직업공공훈련원(1971), 미국은 용산의 정수직업훈련원(1973), 일본은 대전직업훈련원(1976), 벨기에는 한백창원직업훈련원(1976) 등의 설립을 지원했다. 이에 더해 ADB(아시아 개발은행)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지원으로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전국에 모두 20개 공공직업훈련원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정택수가 2008년 출판한 책 《직업능력개발제도의 변천과 과제》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 ‘공공직업훈련’과 ‘사업 내 직업훈련’을 통해 모두 81만명의 기능공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공고’ 교육을 통해 충원된 기능공의 규모 50만명을 이에 더하면 130만명 이상의 기능공이 당시 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숙련 노동자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는 김진균 교수의 논문에 등장하는 정부의 계획, 즉 10년 동안 134만명 기능공을 양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실제로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해준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울산·마산·창원 등과 같은 지역의 중화학공업단지에 당시 신설되고 있던 오늘날의 대기업 공장에 모두 취업했다. 또한 이들은 1987년을 전후로 학생운동과 연대해 ‘노동자 대투쟁’을 주도했다. 당시 지속된 한국 경제의 호황과 함께 전개된 노동운동 덕분에 이들이 일하던 공장에는 노동조합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들어섰고, 이들에 대한 처우 또한 전반적으로 급상승했다.


현대중공업 기능공들의 계층 상승

 

한편 이들은 1997년에 들이닥친 외환위기의 후폭풍으로 구조조정, 즉 해고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기도 했다. 이 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노동자 집단의 양극화 과정에서 잘나가는 대기업 부문의 정규직 숙련 노동자를 대표하는 집단이 바로 이 기능공 출신들이다. 오늘날 양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이들은 심지어 노동귀족이라는 호칭까지 얻을 정도로 임금은 물론 복지 수준도 높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착취는커녕 안정된 직장과 고임금을 누리는 중산층 노동자로 성장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유광호·류석춘은 2015년 《동서연구》 27권 3호에 〈정주영의 기능공 양성과 중산층 사회의 등장: 현대중공업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기능공을 대규모로 고용하는 대표적 장치산업인 조선업에서 지난 40년간 진행된 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소속 계층의 변화를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1973년부터 1983년까지 현대중공업에 생산직으로 입사하여 2015년 현재까지 근속하고 있는 기능공 20명을 찾아, 이들을 대상으로 ▲입사 당시의 소속 계층 ▲임금 소득을 비롯한 제반 처우의 변화 ▲2015년 현재의 소속 계층을 추적했다.
 
입사할 당시 이들의 소속 계층은 ‘중상’ 1명, ‘중중’ 4명, ‘중하’ 9명, 그리고 ‘하’ 6명이었다. 그러나 2015년 현재 이들은 모두 ‘중중’ 계층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입사 당시 ‘중중’ 계층보다 아래 계층에 속해 있던 ‘중하’ 9명과 ‘하’ 6명이 오늘날에는 ‘중중’ 계층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전체 조사대상 20명 가운데 이들 15명, 즉 75%가 계층의 상승이동을 경험한 셈이다.
 
 
중산층이 된 기능공들

 

유광호·류석춘은 또한 현대중공업 인력개발팀의 협조로 1973년 입사하여 2015년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는 기능공 출신 생산직 직원 한 사람의 연도별 시계열 ‘기본급’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림 2〉는 이 자료로부터 현대중공업 기능공의 월평균 임금을 도시근로자가구 월평균 경상소득과 비교한 결과다. 이 그림이 제공하는 정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우선, 입사 초기부터 현대중공업 기능공은 도시근로자가구의 평균소득을 상회하는 보수를 받았다. 다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면서부터 그 차이가 조금씩 커졌음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조가 회사와 쟁의를 하지 않고 협조적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1995년부터 2013년까지 그 차이는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벌어지며 기능공 소득이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착취’라는 말을 전혀 끄집어낼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 논문이 사례로 분석한 현대중공업 기능공의 임금상승 상황은 박정희가 혹은 대한민국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절대 말할 수 없게 한다. 박정희는 1970년대 중하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숙련할 수 있도록 기술·기능 교육을 제공했고, 또한 일자리를 제공해 결국에는 이들을 중산층으로 편입 시키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런 상황은 결코 현대중공업이라는 특정 회사에 소속된 특정 기능공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당시 새로 시작한 중화학공업 분야의 공장에 취직한 모든 기능공이 공유한 경험이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40년이 지난 지금 엄청난 임금과 복지를 누리며 해외여행을 즐기는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계층의 상승 이동을 경험한 노동자들의 규모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로만 국한해서 따져도 최소 100만명 이상에 달한다. 4인 가족 기준 도합 400만명 이상의 중산층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착취’는 없었다

앞의 현대중공업 노동자에 대한 분석 결과를 두고 여전히 일부 독자는 매우 제한적인 분야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따라 탄생하여 오늘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 기업에 속한다. 비록 조선업의 국제적 여건 변화 그리고 노사관계의 악화 때문에 2017년 현재 심각한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고는 있지만, 분명 현대중공업은 당시 출발한 기업 가운데 가장 성공한 기업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다른 경우는 어떤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각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앞에서와 같은 분석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그들이 일한 만큼 보상을 적절히 받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거시적 통계자료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3〉은 성신여대 경제학부 박기성(Park Ki Seung) 교수가 2007년 영문학술지 《Pacific Economic Review》 12권 5호에 〈한국의 노사관계와 경제성장(Industrial Relation and Economic Growth i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 등장하는 도표다. 이 도표는 1963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임금이 동반해서 상승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노동의 한계생산성은 노동을 한 단위 더 투입할 때 생산이 얼마나 증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따라서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하면 그만큼 기업의 생산이 증가한다. 물론, 생산이 증가하면 기업의 수익도 늘어난다. 이때 노동에 대한 보수가 늘어나면 노동은 적절한 보상을 받는 셈이다. 만약 이때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노동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이 기여한 몫, 즉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노동에 대한 착취가 발생한 경우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도표는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 1999년까지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었음을 확인해주는 객관적 자료다.
 
오히려 이 도표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던 해부터 1997년 외환위기가 오는 해까지 약 10년간 임금 상승이 노동의 한계생산성 상승을 상당한 수준으로 앞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기간에는 노동이 생산에 기여한 몫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아갔다. 이와 같은 상황이 약 10년간 누적되면서 결국에는 1997년 경제 외환위기가 발생하였음을 이 도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표는 1997년 위기 이후 다시 두 지표의 상승이 수렴(收斂)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따라서 위기를 매개로 노동이 기여한 만큼의 임금을 받아가도록 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도표는 대한민국이 노동자를 ‘착취’하기는커녕 임금 상승이 노동의 한계생산성 상승을 웃도는 기간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이나 지속되면서 경제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표다. 이 상황을 두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말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류석춘 교수는 기고문에서 당시 16세의 나이로 돈벌러 나온 전태일에게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3년만에 월급이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10배로 올랐다..

 

류석춘 교수가 주장하는 착취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월급이 올랐기에 착취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월급이 그당시 기준으로 볼 때 많은 소득이기에 오히려 성공한 삶을 살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알려진대로 전태일은 처음 16세에 시다로 일하기 시작해서 쭉.. 꾸준히 일하지는 못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처음에는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월급이 1500원이라면... 결국 30일을 계속 일했다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누가 한달에 하루만 쉬고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때 당시엔 하루 8시간 근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몸이 망가져 일을 그만두는 건 부지기수겠네요.. 

 

관련링크 : 전태일(위키백과)

그리고 3년만에 1만 500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언급했는데..이에 전태일재단에선 당시 재단사는 재단보조를 두었는데 보조에 대한 월급은 재단사가 지급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결국 1만 5000원의 월급에는 재단보조의 월급도 포함된 금액이라는 것.. 그리고 전태일씨가 당시에 한달에 몇일을 일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이 류석춘교수가 놓친 부분입니다.

 

노동환경에 대해선 전태일씨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주일에 98시간이라는 근로시간...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근로조건을 어린 시다공들이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업주는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건강진단도 하지도 않고 있다 언급합니다.

 

이런 시다공들을 위해 전태일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노동운동을 벌이다 결국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요구조건은 간단했습니다. 하루 근로시간 10시간~12시간 1개월 휴일 2일.. 건강진단 시행.. 시다공 수당 70원에서 100원에서 50% 인상(100원을 기준으로 150원이겠네요..)

 

이런걸 착취라 하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돈 많이 받았다고 언급했으나 그 월급을 받는 노동환경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리고 당시 물가등을 무시한 채.. 그저 돈을 많이 받았으니 착취를 받지 않았다 주장하는 류석춘교수...

 

류석춘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 근거인 월급에 대한 상세내역을 보충... 언급이 있었어야 했는데 기고문에는 그런 사항이 없습니다.

 

단순히 당시의 노동환경과 물가등을 생각하지도 않고 월급이 단 몇년만에 10배로 뛰었다는 수학적 접근으로 보는이로 하여금 왜곡된 사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노사관계와 경제성장(Industrial Relation and Economic Growth i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 등장하는 도표를 이용해서 당시 노동환경에 맞는 임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대한 세부적 내용은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표는 한국 전체 직종에 대한 임금을 도표한 것이라 보입니다. 

 

위의 전태일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일반 공무원이 주 45시간을 일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2배를 일하고도 당시 시다공들은 돈을 얼마나 받았을까요? 50원에서 100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당시 공무원들의 월급은 얼마일까요?

공무원의 월급과 시다공들의 월급.. 얼마나 차이가 났을까요? 공무원들의 근로환경과 시다공들의 근로환경.. 얼마나 차이가 있었을까요?

 

그런 환경차이로 인한 월급의 차별성은 있었을까요?

 

이런 사항에 대해서도 류석춘교수는 언급을 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고문에는 관련된 문구는 없습니다. 

 

이런 류석춘 교수의 월간조선 기고문에 대해 전태일재단에서도 입장문을 냈습니다.


관련링크 : 류석춘 교수의 곡학아세를 규탄한다.(전태일재단)

 

최근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연세대 류석춘 교수가 월간조선에 전태일과 관련한 글을 썼다.
내용 자체도 무지와 왜곡투성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전태일과 노동자들을 박정희 정권을 왜곡-미화하는 데 활용했다는 면에서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류석춘 교수는 해당 글 전태일 관련 내용에서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고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3000원을 받았음”으로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어서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이는 수치만 나열하며 그 이면을 보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는 전형적인 곡학아세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류석춘 교수는 임금의 액수만 이야기하고 실질 구매력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 결과 기준점으로 제시한 시다들의 임금이 먹고살 만한 임금이었는지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다. 1960년대 당시 서울의 커피 1잔 값이 50원이었다. 당시 시다들의 월급 1,500원은 하루 종일 일해도 커피 1잔 값밖에 벌지 못하는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받았다는 15,000원 또한 하루 일당이 커피 10잔, 커피값으로 추산하면 요즘 돈으로는 4만원 정도다. 10배가 올라도 하루 일당 4만원, 그야말로 살인적인 저임금인 것이다. 이렇게 시다들의 임금 자체가 살인적인 저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임금의 열 배를 받아도 저임금이었던 사정을 류석춘 교수는 전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다.

둘째, 류석춘 교수는 당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70년대 당시 한국은 유례없는 장시간 노동 국가였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적게 잡아도 주당 105시간, 일요일도 없이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 이렇게 일해서 받는 일당이 시다는 커피 한 잔 값인 50원, 재단사는 커피 10잔 값인 500원이었다. 이게 착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셋째, 류석춘 교수는 당시 노동구조와 임금체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싱사들은 주로 ‘객공’이라는 도급제 방식으로 일했다. 그래서 시다와 미싱보조의 월급도 미싱사가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노동자의 월급으로 주어야 했던, 그래서 미싱사가 실제 가져가는 월급은 훨씬 적었던 기막힌 노동구조를 류석춘 교수는 아예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넷째, 류석춘 교수는 전태일평전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전태일평전과 일기를 보면 전태일이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 전태일은 재단사와 재단보조, 다림질까지 1인 3역의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전태일이 월급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 것은 전태일평전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그 외 GDP 통계를 활용한 주장 등은 경제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황당한 이야기이므로 굳이 더 논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류석춘 교수처럼 편협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불순하게 전태일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역사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도 전태일에 대해 언급하겠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검토와 연구를 한 후 이야기하는 것이 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점을 류석춘 교수에게 다시 상기시켜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류석춘 교수는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몰역사적이다.
그런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고, 우리 사회의 적폐다.


류석춘 교수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오점을 반성하고 당장 교수직을 사퇴해야 할 것이다.

2019년 10월 11일

전태일재단


이에대해 류석춘교수의 입장에 대해선 후속 보도가 나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동환경을 무시하고 그저 임금만으로 비교하여 박정희 정권시절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지 않았다는 류석춘교수의 주장..

 

착취란 개요만 따진다면 이미 그당시 전태일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관련링크 : 착취(나무위키)

 

搾取 / Exploitation

일반적으로는 힘들거나 고된 일임에도 불구하고(물론 이는 지극히 유동적인 기준이다.) 사회통념이나 혹은 유사 사례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간단히 말해 '너무 낮은 임금을 받고 부려먹히면' 보통 착취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낮은 임금의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주류경제학에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류석춘교수는 앞으로 주 98시간의 노동환경에 일50~100원의 일당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착취를 안당했다는 근거를 새롭게 제시해야 합니다..

 

전태일씨가 10배로 받아 성공했다는 주장에 대해 해당 월급이 모두 전태일씨의 월급만이었는지.. 전태일씨가 재단사로서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을 했고 그에 맞는 월급을 받았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여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지껏 주장에 대해선 전태일평전을 참고로 분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재단에선 류석춘교수는 전태일평전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고도 주장합니다. 즉 일부만 따와서 류교수의 입맛에 맞게 적용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대한 반론도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자신이 주장한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한 주장일 뿐이라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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