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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사회

재판 이겨도 배상·사과 못받고..강제동원 이춘면 할머니 별세

by 체커 201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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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항소심 공판을 마친 이춘면 할머니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재판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 할 때 반성하지 않는 일본 기업이나 아베 총리에 대해 크게 화를 내셨어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지난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일본 전범 기업인 후지코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중인 이 할머니는 결국 일본 기업과 정부 어디에서도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소송을 도운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이 할머니에 대해 위와 같이 전했다.


항소심 승소에도 ‘분노’…사건은 대법 계류 중


이 할머니는 13살이던 1944년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면 상급 학교에 진학시켜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후지코시 측 거짓말에 속아 일본으로 떠났다. 설명 책자에도 ‘일본 기업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도야마시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에서의 삶은 약속과는 전혀 달랐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0∼12시간씩 철을 깎거나 자르는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임금은커녕 다쳐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이듬해인 194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할머니를 비롯한 23명은 지난 2015년 5월 자신이 입은 정신적ㆍ육체적ㆍ경제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후지코시에 1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한국 법원에 냈다. 2017년 3월 1심은 후지코시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이 할머니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후지코시 측은 이 할머니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소멸했다는 이유로 항소했지만, 지난 1월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회사 측이 1억원을 지급하라”며 1심과 같이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과 관련, 임재성·김세은 변호사가 지난 2월 도쿄(東京) 미나토(港)구에 있는 일본 기업인 후지코시 본사를 방문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지코시 본사가 있는 건물 입구에서 경비 용역 직원들과 두 변호사(가운데 뒷모습) 및 지원단 등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당시 승소 판결이 나왔음에도 기자회견에서 이 할머니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해 신일철주금이나 미쓰비시중공업 관련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도 일본의 사과나 배상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 할머니가 크게 화를 내셨다”며 “항소심 승소에도 불구하고 많이 속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예상대로 후지코시가 불복하면서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가 현재 계류 중이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 자세히 알고 계셨다"


김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서도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한 소식을 꾸준히 접했다고 한다. 그는 “양쪽 정부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며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당시에 국민학교도 나오고 공부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들이다. 뉴스나 신문을 꾸준히 보시며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고 전했다.

이 할머니는 생전 슬하에 아들 2명, 딸 2명을 뒀다. 소송은 유족이 이어갈 예정이다.


"다른 할머니들도 대부분 건강 악화"


김 사무국장은 “23명 할머니 중 자택에서 일상 생활이 가능하신 분은 2명뿐”이라며 “나머지 분들은 위독하시거나 요양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편 신일철주금ㆍ미쓰비시중공업 관련해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이춘면 할머니가 별세하였다고 합니다.. 법원의 1심, 2심을 승소했지만 결국 보상.. 최소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근로정신대.. 일제강점기 시절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들을 군수공장에 투입시켜 노동력을 착취했는데 이때 조선인들을 끌어들여 투입시킨 조직이 근로정신대..조선여자근로정신대입니다. 여성을 상대로 강제 노동력 투입 조직이네요.


관련링크 : 조선여자근로정신대(위키백과)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실제 조선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법령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

 

1944년 봄에 취업 및 진학을 시켜준다고 꾀어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한 뒤 미쓰비시 중공업의 군용 항공기 공장에서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다. 이 가운데는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간 경우도 있었다. 이 공장에서 강제로 노동한 조선인 여성은 약 400명으로 파악된다.

경상북도 등지에서 모집된 소녀들이 군수업체인 후지코시 철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경성가정의숙 학생이던 김금진은 이 학교 교장인 황신덕이 1943년에 다른 학교와 달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며 한탄하는 것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자원해 들어갔다. 김금진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총알 만드는 일을 하다가 종전 후 귀국하였다.

이밖에 도쿄 마사방적주식회사 누마즈 공장,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도토쿠 공장, 나가사키 조선소, 사가미 해군공창, 야하타 제철소 등이 강제로 끌려가 노역한 곳으로 지적되었다.


일본 기업은 부정하면서... 재판에 패소까지 하면서도 버티고 버티는 상황... 이대로라면 피해자분들이 모두 사망할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계속 버틸 요량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중요한 건 기록을 남기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증인들이 다 가서 증언할 이 하나 없어질 때... 일본과 일본 기업이 왜곡된 주장을 하더라도.. 증언할 이 없어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라고 남긴 증거와 증언으로 반박할 수 있을테니까요..

 

차라리 독일처럼 인정하고 사죄부터 하고 배상은 천천히 했었으면 피해자분들이 그리 원통해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잘못없다는 뻔뻔한 자세가 피해자분들의 분노의 원인이라는 걸 저들이 알고 있는건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한일청구권 협정이 계속 발목잡고 있는게 현재 상황... 개인청구권은 살아있다는 일본 대법원의 판결이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있음에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모든게 다 끝났다는 일본정부나 한국의 보수단체나 이들이 있기에 어찌보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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