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도움거리/일반

日군국주의의 또 다른 광기..인간기뢰 '후쿠류' 자살특공대

by 체커 2019. 9. 16.
반응형

다음

 

네이버

 

왼쪽 사진은 후쿠류 장비를 입은 특공대원을 촬영한 것으로 전후 기밀해제된 자료다. 오른쪽 사진은 1946년 1월 미국 해군이 작성한 후쿠류 장비 개념도다. [사진 미 해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에 이어 또 다른 자살 특공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룡을 뜻하는 일본어 ‘후쿠류(伏龍)’로 통칭된 해저 특공대다. 이들은 일종의 ‘인간 기뢰’였다. 잠수복을 입고 수심이 깊지 않은 바닷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긴 막대기에 장착한 기뢰를 이용해 상륙 직전의 적 함정을 폭파시킨다는 시나리오였다.
일본 해군이 일본 본토, 특히 도쿄만을 사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했다. 그러나 불과 패망 3개월 전 급조한 데다가 훈련 과정에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 실전에 투입되진 않았다.


‘바닷속고독을 견딜 수 있는 자’


미 해군이 작성한 1946년 1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 일본 해군은 44년 이 특공대의 개념을 만들었다. 본격적인 잠수복과 공격무기 개발은 45년 2월부터 일본 해군의 거점인 요코스카(横須賀)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일 해군성은 미군의 본토 상륙이 임박해오자 부대 창설에 속도를 냈다. 총 6000명 단위 부대를 그해 9월 30일까지 만들어 10월 15일쯤 실전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후쿠류는 가미카제의 예비 병력 성격이 강했다. 45년 3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를 기점으로 가미카제 출격기가 거의 소진되자 남은 특공대원을 후쿠류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후쿠류 특공대원들의 단체 기념 사진. 이들은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양성하는 일본 해군 예과연습생(요카렌·予科練) 출신이었다. [요카렌평화기념관 홈페이지 캡처]

특공대원 선발 과정에서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 14살 때 후쿠류로 선발된 스즈키 이치로(88)는 가미카제 조종사를 목표로 해군 예과 연습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지난달 NHK의 종전일 특집프로그램에서 “특공대원은 거의 대부분 15~20살 정도였다. 내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며 “집이 매우 가난했다. 특공대로 죽으면 동상을 세워줘 마을의 영예가 될 거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일설에 따르면 ‘해저에서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선발 조건에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잠수 상태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 작전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때문에 비교적 책임감이 강한 장남들이 대거 선발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3.3m 기뢰봉에 성형작약탄 장착


후쿠류 대원은 검정고무 재질의 잠수복을 입고 등에 산소통 2개(각 3.5L)를 멨다. 해저 작전에 용이하도록 납으로 만든 허리띠를 메고 납으로 엮은 짚신을 신는 등 잠수복 무게를 높였다. 장비 전체 중량은 약 70㎏에 달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15시간 동안 임무를 할 수 있도록 잠수 장비를 제작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실제 대기 가능시간은 5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잠수 장비는 최대 수심 15m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걸어서 이동하고 기뢰봉을 써야 한다는 특성상 작전 수심은 4~6m 정도였다. 3.3m 길이의 긴 대나무 봉에 기뢰를 장착해 다가오는 적함에 부딪혀 폭발시킨다는 개념이었다. 기뢰로는 15㎏의 성형작약탄(폭발력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지향성 폭탄)인 ‘5식격뢰’가 사용됐다. 원리 상 머리 위로 지나가는 함정이어야만 폭발이 가능한데, 이 경우 후쿠류 대원은 거의 100% 사망하게 된다.

후쿠류 특공대의 작전 개념을 그래픽으로 재현한 NHK 영상. 해저 잠수한 상태에서 긴 막대기 끝에 폭약을 장착한 기뢰봉을 이용해 적 상륙 함정을 폭발시킨다는 계획이었다. [NHK 화면 캡처]

45년 6월부터 요코스카 대잠(對潛)학교에서 선발 부대원 480명에 대한 훈련이 시작됐다. 그런데 훈련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잠수 장비 때문이었다. 전쟁통에 구할 수 있는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임시방편으로 만들다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또 1개월이란 짧은 개발 기간 때문인지 치명적인 결함도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장시간 잠수가 가능하게 고안한 반순환식 산소공급기, 일명 ‘청정캔’이었다. 가슴에 장착한 청정캔 안에는 독성 물질인 가성소다(양잿물)가 들어있었다. 숨을 내쉴 때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험 결과 3, 4차례만 호흡해도 탄소가스 중독으로 실신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 통 자체가 양철 재질이어서 바위에 부딪히면 쉽게 파손됐다. 이때 바닷물과 가성소다가 반응하면서 만들어진 고온의 독극물을 들이킨 특공대원은 대부분 사망했다. 스즈키는 방송에서 “청정캔에 구멍이 뚫리면 수압으로 물이 들어와서 머리 위부터 (독극물 액체가) 내려오게 된다”며 “그걸 코로 들이마시면 체내로 극약 성분이 퍼지면서 괴로워하다가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 광기가 빚은 무모한 작전


본토 사수를 위한 최종 병기인 후쿠류를 누가 정식으로 제안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 전쟁 지휘부인 대본영의 광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로 후쿠류를 들기도 한다. 자살공격을 떠나 누가 보더라도 애당초 불가능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나쁜 바닷속에서 적선의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보다 2배 이상 긴 기뢰봉을 휘젓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조류 탓에 해저에서 걷는 일조차 힘들었다는 것이 당시 대원들의 증언이다. 상륙작전에 앞서 미군 함포 사격이 집중될 경우 기뢰 폭발로 촘촘히 대기 중이던 후쿠류 대원들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상황도 예견 가능했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 전쟁박물관인 유슈칸에 전시된 후쿠류 미니어처. [트위터 캡처]

일 해군성은 요코스카(5개 대대), 구레(呉, 2개 대대), 사세보(佐世保, 2개 대대), 마이즈루(舞鶴, 1개 대대) 등 주요 군항에 후쿠류 부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패전일까지 각지에서 훈련을 마친 병력만 30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 281명은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만일 10월까지 전쟁이 계속됐다면 전원 전사했을 가능성이 컸다.


전후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는 스즈키는 방송에서 “사람의 목숨은 둘이 아니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카미카제...일본이 2차세계대전때 미국에게 승리하기 위해 선택한 극단적 공격방법.. 자살특공대라 하죠..

 

관련링크 : 카미카제

 

하지만 이런 작전을 실행한 덕에 일본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다수 죽음으로써 어찌보면 일본의 패망이 앞당겨지는 한 부분으로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일본에 대해 배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신나간 윗선의 판단에 아래에선 반박하거나 거절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정도는 얻을 수 있겠네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