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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인가, '사기'인가..어느 전쟁 영웅의 '인천상륙작전'(최규봉 전 켈로 부대장)

by 체커 2021.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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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역사’와 ‘기억’은 구별돼야 한다.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기억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기억은 역사를 배합해 원하는 것만 남길 수 있다. ‘참혹한 패배’가 ‘빛나는 승리’가 되고, ‘평범한 군인’이 ‘전쟁 영웅’으로 둔갑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기억으로 역사를 대체하는 일은 신중해야만 한다.

한국전쟁(6·25전쟁)은 지난 70여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 혼재된 상황에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생존해 있고, 이들이 떠올린 기억으로 일부 역사가 뒤집어졌다. 이중 한국군이 주도한 승리는 곧바로 역사가 됐다. 전쟁 영웅이 되는 것 역시 본인의 기억만으로도 가능했다. 6·25전쟁이 ‘역사’인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결국, 후세대는 일부 검증되지 않은 기억도 역사로 학습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지난 한달, 경향신문은 6·25전쟁 중 있었던 한 첩보작전을 추적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점으로 유명한 이 작전은 ‘극적인 성공’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팔미도 점령 작전’과 최규봉 켈로(KLO)부대 대장의 이야기다. 최씨의 무용담은 국가기관에서 홍보하는 역사가 됐다. 하지만 추적 끝에 마주한 실체는 ‘기억이 역사로 둔갑하는 광경’이었다. ‘팔미도 점령 작전’은 한명의 전쟁 영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실체가 불분명한 영웅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무명용사의 희생 위에 서 있었다.

■팔미도

인천 연안부두에서 8.5해리(15.7㎞), 편도 약 1시간 거리에 작은 섬 하나가 홀로 떠 있다. 모양이 마치 여덟 팔(八)자와 닮았다 하여 ‘팔미도’라 불린다. 서해에서 인천으로 들어가는 물길 ‘비어수로’ 한가운데에 있어 섬에서 보이는 것은 수평선과 간간이 지나는 대형 선박이 전부다. 그럼에도 섬은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해지는 풍경’은 인천 팔경의 하나로도 꼽힌다.

인천 팔미도섬 / 김찬호 기자

이 섬에서 인간의 손길이 닿은 유일한 볼거리는 ‘등대’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 2개가 서 있다. 이중 높이 7.9m의 구 등대는 100년 동안 인천으로 들어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지난 2003년 신 등대에 역할을 내줬지만,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영구 보존이 결정됐다. 일반적으로 팔미도등대는 이 ‘구 등대’를 의미한다. 섬을 방문한 관광객 중에는 구 등대를 보기 위해 방문한 사람도 있다. 구 등대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사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팔미도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6월 1일 첫 불을 밝혔다. 이 등대는 일본인 이시바시 아야히코가 세웠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군사적 필요와 통상의 편리함을 위해 대한제국 주요 섬에 등대를 설치했다. 그 시작이 팔미도등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알려진 팔미도등대. 앞쪽 작은 등대가 ‘구 등대’다 / 김찬호 기자

‘침략의 불빛’으로 시작된 팔미도등대가 극적인 반전을 맞은 것은 6·25전쟁 때다. 1950년 6월 29일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심했다. 작전참모인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 전략기획단이 구체적 계획을 만들었다. 상륙작전은 100-B, 100-C, 100-D 3가지 계획이 동시에 검토됐다. 각각 인천, 군산, 주문진으로의 상륙이었다. 맥아더는 이중 인천을 선택했다. 그는 정치적·군사적·심리적 이유에서 반드시 서울을 수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가능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것이 인천상륙이었다. 1950년 8월 12일 작전 계획 100-B가 하달됐고, 작전 개시일은 9월 15일로 정해졌다. 이 계획에는 ‘크로마이트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었다.

하지만 인천은 지리적 문제가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로 상륙에 적합한 날이 한정됐고, 외항의 규모 역시 대규모 함대가 정박하기 어려웠다. 특히 상륙함이 인천해안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작은 섬과 암초로 휩싸인 비어수로를 지나가야 했다. 항로의 위험한 곳을 표시해줄 장치가 필요했다. 등대가 있는 팔미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으로 팔미도 점령 작전을 준비했다. 이른바 ‘트루디 잭슨’ 작전의 시작이었다.

유진 클라크의 책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에 소개된 1950년대 해도

정부 기록을 종합하면 팔미도 점령 작전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당시 미국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였다. 클라크는 한국인 동료 연정, 계인주 및 한국인 지원자 10명과 함께 팔미도 인근 영흥도에 머물며 등대 점령을 준비했다. 9월 10일 팔미도에 상륙한 클라크 첩보대는 등대 사용에 이상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도쿄에 알렸다. 맥아더사령부는 9월 15일 0시, 팔미도등대를 점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14일 클라크 첩보대는 팔미도에 상륙해 등대를 점등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의혹

이날 작전을 두고 팔미도등대 앞에는 3개의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인천시 유형문화재임을 알리는 설명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지방해양항만청에서 세운 설명판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클라크 미군 대위가 한국군 유격부대(KLO)의 지원을 받아 점령한 등대’라는 내용이다.

문제는 세 번째 설명판이다. 켈로8240 부대 전우회가 주관하고,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협찬해 만들었다. 설명문 바로 옆에는 맥아더의 얼굴까지 조각돼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문장은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을 지낸 구상씨가 작성했다.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설명문에는 기존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등대 탈환에 직접 참여한 것이 클라크, 계인주, 연정 외에 한국인이 한명 더 있다는 것이다. 그 한국인은 최규봉 켈로부대 대장이다. 두 번째는 작전이 있었던 9월 14일, 나사못이 빠져 등대가 점등불능 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진맥진해 누워 있던 중 최씨 손에 나사못이 잡혔고, 극적인 순간 점등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은 점등에 성공한 뒤 성조기를 등대에 걸었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가 이 성조기와 친필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최씨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켈로(KLO)8240부대가 주관해 세운 최규봉 전 켈로 부대장 공적 기림비 / 김찬호 기자

이는 지난 2003년 최씨가 ‘월간조선’과 인터뷰하며 주장한 내용과 같다. 2016년 개봉한 한 영화에도 팔미도 점령 작전 내용이 일부 담기며 이 사건은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서울 전쟁기념관은 해당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며 최씨가 맥아더로부터 받았다는 감사서신도 전시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팔미도 탈환 작전에 참여한 최규봉 전 켈로부대 유격대장으로부터 당시 게양했던 미국 국기를 기증받은 맥아더 장군이 1957년 11월 8일 감사의 표시로 보낸 편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 최씨의 활약을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추적

최씨는 이미 사망했다. 최씨의 무용담을 소개하고 있는 기관들은 “더 이상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6·25전쟁 관련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전쟁사연구자 A씨는 “6·25전쟁 시기 확인되지 않는 무용담으로 공로를 인정받은 분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며 “특히 특수작전의 경우 작전 기록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 횡행한다”고 말했다.

최씨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어렵다. 최씨와 함께 전우회 활동을 한 김상기 켈로8240 전우회 회장은 “최씨는 전우회 사람들에게도 자기 가족들을 소개하지 않았다”며 “전우회도 최씨 가족들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씨 가족들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씨 주장이 검증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작전 관련자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해보면 진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클라크 대위의 수기다. 그가 사망한 이후인 2002년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클라크는 소속 부대 및 작전 참여 과정이 명확하고, 전쟁 이후 한국과 이해관계도 없다.

클라크 수기에는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인물로 계인주, 연정만 언급됐다. 최씨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계인주는 회고록에 최씨를 ‘자신을 도왔던 사람’ 정도로 간단히 언급했다. 연정은 자서전에 팔미도 작전과 당시 촬영한 사진을 소개했지만 최씨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연정의 동생 연상씨는 기자와 만나 “형으로부터 당시 작전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최씨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클라크 수기를 국내에 소개한 재미 작가 조화유씨는 기자에게 “최씨의 언론 인터뷰를 제외하면 그의 활약상이 적힌 문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며 “최씨는 팔미도 점령 과정에서 적과 교전이 있었다고 했지만, 클라크 수기에는 교전도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팔미도 점령 작전에 참가한 연정씨가 공개한 사진. 뒷 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연정 / 6·25전쟁 비화

또 다른 의혹은 나사못 부분이다. 전쟁 당시 등대는 석유 백열등을 사용해 불빛을 만들었다. 1954년 8월에야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등으로 교체됐다. 그렇다면, 어떤 나사못이 빠졌길래 점등이 불가능했느냐가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최씨는 이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언론 인터뷰에서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다”는 말만 했다. 최씨 주장을 담은 설명판을 세우는 데 협찬한 해군, 유물 전시를 담당한 전쟁기념관도 사실관계는 알지 못한다. 누구도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에 관해 김 회장은 한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김 회장은 “팔미도에 설명판을 세울 당시 인천수산청 항로표지과 과장이 ‘기술적으로 팔미도등대 점등과 나사못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그 이야기가 왜 들어갔냐’고 항의했다”며 “이미 만들어놓은 설명판을 폐기할 수도 없어 그냥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의혹은 성조기 부분이다. 최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55년 맥아더에게 팔미도 점령 당시 등대에 걸었다는 성조기를 선물했다. 그러자 미 대사관 측이 성조기의 진위를 알 수 없다며 당시 서울 중구에 있는 반도호텔에 최씨를 감금하고 조사했다. 최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새벽 무렵 대사관 직원이 본부의 연락을 받고는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알고 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성조기 밑에 당시 팔미도등대 탈환 작전의 작전명령 번호가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 주장의 진위는 성조기에 ‘작전명령 번호’가 진짜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미국 맥아더 박물관에 이 부분에 관해 문의했다. 박물관 큐레이터 서튼 코레이씨는 기자에게 “최씨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해당 성조기에는 작전명령 번호가 없으며, 현재는 박물관 여건상 전시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맥아더가 최씨에게 보낸 감사서신 역시 성조기 선물에 대한 답례 이상의 의미로 보기 어렵다.

최씨가 맥아더 장군에게 선물한 성조기에 ‘작전명령 번호’가 있는지에 대한 맥아더 박물관의 답변

■영웅

최씨의 무용담을 검증할 증거는 접근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기관은 최씨 주장을 있는 그대로 홍보하고 있다. 이는 왜일까.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는 곳은 전쟁기념관이다. 최씨가 받았다는 맥아더 서신을 전시하고, 한쪽 벽면에는 나사못 이야기까지 크게 홍보하고 있다. 전쟁기념관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씨가 맥아더 장군 서신을 기증하며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한 것”이라며 “추가적인 사실 검증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가 실제 참전자이기도 하니 그분 의사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쟁사연구자 B씨는 “매번 그런 식이다”며 “관련 논문 한두편만 읽어도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참전용사의 증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검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맥아더 서신(왼쪽)과 팔미도등대 점령 작전 소개 / 김찬호 기자

또 다른 이유는 지난 6월 19일 기자와 팔미도에 동행했던 문화관광해설사 조한기씨의 말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조씨는 “원래 팔미도는 관광객 입도가 불가능했는데 2009년 ‘인천 방문의 해’를 맞아 일반에 공개됐다”며 “2016년 6·25전쟁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 이후 관광객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영화 같은 극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최씨의 무용담이 좋은 홍보 수단이 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조씨는 “나사못으로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는 당최 모르겠다”며 “이 부분을 설명할 때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최씨 스스로 누가 검증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최씨가 무용담을 본격적으로 언급할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클라크, 계인주, 연정은 국내에 없거나 사망한 상태였다. 김 회장은 “당시에는 최씨가 그렇다고 하니 다들 그런 줄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나사못 사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면 피곤하니까 다들 좋게 넘어가자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상의 이유로 최씨는 팔미도 점령 작전의 영웅이 됐다. 해군은 2012년 최씨에게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이라며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작전들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다. 이에 대해 해군 관계자는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이라는 책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국방부에 훈장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또 팔미도에 세워진 설명판과 관련해서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들을 찾을 수 없어 경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실

한명의 전쟁 영웅이 부각되면 그를 도운 수많은 무명용사는 사라진다. 이는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클라크 첩보대를 도와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한국 해군 소속 첩보부대와 이름 모를 청년들이 있었다. 특히 청년들은 팔미도 인근 영흥도에 거주하며 농사짓던 주민이거나 황해도 등지에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실향민들이었다. 이들은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보급선 현황, 상륙지점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이러한 이들의 활약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있었던 상륙작전들에 비해 사상자 수가 눈에 띄게 적다. 1945년 2월 벌어진 이오섬(이오지마) 상륙작전에는 8만7000여명이 상륙해 2만6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비율로는 30%에 달한다. 반면 인천상륙작전은 5만3900명이 상륙해 사상자는 2400명이었다. 비율로는 4% 정도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상호 박사는 “이러한 결과는 상륙지점 정보를 모았던 이름 모를 한국인 청년단의 활약으로 가능했다”며 “이들이야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한 진짜 영웅들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흥도에서 클라크 첩보대를 도왔던 청년들은 정확한 수도, 이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명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 내 인천상륙작전 전시관도 이들의 활약상을 소개하지 않는다. 무명용사들의 활약으로 채워야 할 자리는 확인되지도 않은 무용담으로만 가득하다. 이 박사는 “전쟁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한 세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며 “그동안은 살아계신 참전 용사들을 예우하기 위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그대로 뒀다면 이제는 역사를 바로잡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최씨가 켈로부대 대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팔미도 점령 작전에 최씨가 정말 참전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그럼에도 최씨는 팔미도 점령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단 최씨뿐만 아니라 6·25전쟁사에는 여러 사람의 공로가 한사람 공적으로 잘못 기록되는 경우가 많다. 무리한 전쟁 영웅 만들기가 불러온 결과인 것이다. 6·25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400만~450만명으로 추산된다. 영웅 한사람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다.

인천|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인천상륙작전시.. 팔미도 점령작전에 대한 내용과 캘로부대장 최규봉씨에 대한 내용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팔미도 점령작전시.. 캘로부대가 활약한건 맞지만.. 당시에 최규봉씨가 있었는지는 불명확..

 

전쟁기념관에서 팔미도 점령작전에 대해 언급한 내용중 나사못에 대해선.. 당시에는 석유 백열등을 사용.. 어떤 나사못이 빠졌기에 점등이 불가능했는지에 대해선 당사자도 언급이 없었음..그저 반사경 전선이 끊어졌다는 말만 있음..

 

1955년 최씨는 팔미도 점령당시 게양했다는 성조기를 맥아더장군에게 선물했다고 하는데.. 이에 주한미국대사관측에서 최씨를 조사.. 대사관 직원이 본부에 연락을 받고 최씨에게 사과.. 알고보니 성조기에 팔미도 작전명령 번호가 있었던것..

 

그래서 선물한 성조기에 작전명령 번호가 있는지 현지 맥아더 박물관에 문의... 성조기를 받은건 맞으나 작전명령 번호는 없었음.. 맥아더가 최씨에게 보낸 서신은 성조기 선물에 대한 답례 이상의 의미로 볼 수 없다고 함..

 

최씨가 캘로부대장인 것은 맞으나.. 팔미도 점령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투명함.. 대신 팔미도 점령작전에 도움을 준 이름모를 청년들에 대한 자료가 없고 이들은 잊혀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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