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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사회

한덕수·박보균, '위안부 망언' 쏟아지던 해 일왕 생일 축하연 참석

by 체커 2022.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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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왼쪽)와 박보균 문체부장관 후보자.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8년여 전 일왕 생일 축하연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두 사람이 축하연에 참석한 시점은 일본 정치인들의 ‘위안부’ 망언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18일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한 후보자와 박 후보자는 2013년 12월 5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2층에서 열린 아키히토 일왕의 79세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다. 당시 한 후보자는 한국무역협회 회장이었고, 박 후보자는 중앙일보 대기자였다.

두 사람이 축하연에 참석한 시점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르던 시기였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지사는 같은 해 6월 도쿄의 한 거리 연설에서 “위안부를 알선한 것은 상인들인데 국가가 했다고 한 게 고노담화”라고 했다.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지사도 “전쟁터에서 위안부는 필요하다. 왜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독도와 관련된 망언도 있었다. 같은 해 11월 당시 일본 자민당 소속 다케시타 와타루 중의원은 한국 국회의원 초청 행사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독도가 속한 시마네현 국회의원’이라고 말했다. 이에 새누리당 김정훈·김희정 의원 등이 “부산 출신 의원이 대마도가 내 지역구라고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항의해 20여분간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해 축하연은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축하연이 열린 행사장에는 안내문이 세워지지 않았고. 경호원 10여명이 수시로 로비를 돌아다녔다. 대다수 국내 정치인들은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현장에는 대기업 축하 화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참석자는 한 후보자와 박 후보자, 조태영 당시 외교부 대변인,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 김석기 국민의힘 의원(당시 한국공항공사 사장) 등이었다.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일왕 생일 축하연에 참석해 논란이 된 일은 그전에도 있었다. 2010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축하연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져 입길에 올랐다. 논란이 되자 이 전 의원은 “한일교류협회 회장이라 한일 친선 교류를 위해 온 것”이라고 해명했었다.

전 의원은 “박 후보자는 기명 칼럼에서 일본 국민과 비교해 우리 국민이 저급하다고 쓸만큼 친일 성향이 강한 인사로 몸소 일왕 생일 파티까지 다녀왔는데 더 이상 어떤 검증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며 ”이번 인사는 당면 현안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와 역사 교과서 왜곡 등 대일 역사 문제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답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후보자 측은 “당시 박 후보자는 중앙일보 대기자였으며, 아베 정권의 역사왜곡·역주행을 집중 취재 중이었고, 그 대상으로 일본인들이 어떻게 일왕 생일을 다루는지를, 일본의 군국주의 흔적이 계속 작동하는지를 현장 확인하기 위해 갔다”면서 “현장 확인은 기자의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취재 자세”라고 밝혔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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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5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2층에서.. 일본 왕의 생일 축하연이 있었더랬죠..

 

거기에 한덕수 총리 후보자와 박보균 문체부장관 후보자가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별 문제 없었는데 참석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당시에는 일본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에서 망언이 나올 때.. 논란이 커진 상황이었더랬죠..

 

그래서.. 안내문도... 안내 현수막등도 없이 경호원들이 분주히 왔다갔다 하면서 현장을 지키는 엄중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곳에 한 후보와 박 후보가 참석한 겁니다.. 가서 참석을 하면 뭘하겠습니까.. 생일 축하한다 했겠죠..

 

논란이 될텐데.. 박보균 후보자는 당시 중앙일보 대기자로서 취재를 위해 참석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참석을 했다면.. 자신이 쓴 보도에 관련 사진등이 올라왔어야 했겠죠..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박보균 후보자를 옹호하기 위해 쓴 기사글에 첨부된 관련 보도글에 있는 사진에선... 정작 관련 사진은 보이지 않네요..

 

관련 칼럼을 보면.. 대부분 일본에 가서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같이 올립니다. 근데.. 일왕 생일에 관련된 사진은 보이진 않네요..

 

참고링크 :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아베 역사관의 뿌리 조슈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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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역사를 재구성한다. 침략과 팽창의 기억을 각색한다. 그 야심은 집요하다. 그의 역사 인식은 출신 지역과 엮여 있다. 그는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다. 야마구치는 일본 열도 혼슈(本州)의 남단이다. 야마구치는 옛 조슈(長州)번(藩)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일본 근대사다. 반전과 곡절의 드라마다. 그 드라마의 주요 연출·공급지가 조슈다.

 그 한복판에 불꽃의 29년 삶이 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59)-.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이론과 열정을 생산했다. 인물을 대거 공급했다. 정한론(征韓論)을 다듬었다. 이 대목에서 쇼인은 거부의 대상이다.

 아베는 쇼인의 숭배자다. 아베가 흔드는 깃발은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재현이다. 복고(復古)의 우경화 깃발은 단순한 돌출이 아니다. 그 확신과 신념의 바탕은 무엇인가. 쇼인과 야마구치에 해답이 있다.

지 난달 나는 야마구치에 갔다. 야마구치 역사의 심장은 하기(萩)시. 조슈 번의 도읍지였다. 야마구치현의 남쪽 끝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열차에 올랐다. 아베 총리의 지역구(중의원 7선)가 시모노세키와 나가토시다(야마구치 4구). JR 지방열차를 번갈아 탔다. 차창 밖에 우리의 동해가 나타난다. 2시간50분쯤 뒤 히가시하기(東萩)역에 내렸다. 인구 5만여 명. 작은 시골 도시다. 열차에서 사귄 50대 일본인 이시이(石井·사업가)씨는 단정한다. 그는 “쇼인 선생의 하기 이야기가 일본 근대사”라고 했다. 하기 관광 팸플릿은 “유신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을 소개한다. 나의 첫 추적 대상이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의 사설 학당이다. 그곳은 쇼인을 기리는 복합 공간이다. 역사관, 기념관(보물전), ‘쇼인 신사(神社)’로 짜여 있다. 경내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다. ‘明治維新 胎動之地’(태동지지)라고 새겨 있다. 메이지 유신 100주년 기념물이다. 글씨는 총리 시절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의 솜씨다. 사토의 고향은 야마구치다.

 

태동지는 쇼카손주쿠를 뜻한다. 메이지 유신(1868년)은 일본의 자부심이다. 일본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 근대화에 성공했다. 시골 글방은 작고 조촐하다. 단층 목조다. 국가 사적지다. 돌 비석(天皇陛下 行幸啓)이 있다. 1994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방문 기념비다.

 ‘태동지’는 추앙의 표시다. 볼품 없는 글방에 그 용어가 달린 이유는 명쾌했다. ‘강의실’은 다다미 8장 반 크기(4.5평). 쇼인의 초상화, 얼굴상이 놓여 있다. 다른 벽에 얼굴 사진들이 세 줄로 걸려 있다. 쇼인과 12명의 문하생이다.

 

맨 윗줄은 구사카 겐스이(久坂玄瑞),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 대표 제자다. 오른편에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기도는 메이지 유신의 삼걸(三傑) 중 한 명이다. 삼걸은 최고 공신이다.

 다음 줄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다. 메이지 시대 문무 핵심이다. 두 명 모두 총리를 지냈다. 그 옆으로 세 명의 대신(체신·내무·사법)이 이어진다. 이토는 한국 강점의 상징이다. 야마가타는 조슈 군벌의 총수다. 그는 한국 침략의 군사력과 인력을 가동했다.

 사진들을 살펴 가면 놀라움과 기이함이 겹친다. 메이지 유신 주역들이 쏟아져 나와 있다. 일본 근대사의 거물들이다. 일본 관광객들의 카메라 앵글이 감탄 속에 맞춰진다.

 쇼인의 사숙(私塾) 운영은 1년2개월. 감옥 강의까지 합치면 3년쯤(26~29세)이다. 문하생(92명) 중 대학 설립자, 철도, 선박 기술 선구자도 있다. 아베 총리는 “쇼인 선생은 3년간 교육으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작은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 태동지가 됐다”고 했다(2006년 의회 발언).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호기심과 의문이 따른다. 시골 서당 한 마을 한 곳에서, 한꺼번에, 짧은 기간에, 20대 후반 스승에 의해. 쇼인의 독보적인 드라마다.

쇼 인 시대는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말기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미국 함대가 나타났다. 에도(江戶·도쿄) 앞바다 흑선(黑船)의 충격은 일본을 흔들었다.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천황과 쇼군(將軍) 사이, 막부의 쇼군과 번의 다이묘(大名·지방 영주) 사이, 번과 번 사이, 대외 개방과 폐쇄 사이-. 국론이 나눠졌고 사람이 갈렸다. 존왕양이(尊王攘夷·막부 타도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친다) 기치는 거세졌다. 사무라이의 칼이 난무했다. 피가 피를 불렀다. 대란의 시대였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 지역은 조슈와 사쓰마(薩摩)다. 사쓰마는 규슈 남쪽 가고시마(鹿兒島)현이다. 일본의 번들은 신무기와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인재를 경쟁적으로 키웠다. 그 모습은 조선의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달랐다. 조선은 위선적 담론, 인물 빈곤, 폐쇄, 문약(文弱)의 늪에서 허덕였다.

 쇼인은 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다. 수재였다. 11세 때 조슈의 번주(毛利敬親) 앞에서 병학을 강론했다. 그는 당대의 학자를 찾아 배운다. 그는 탈번(脫藩)을 했다. 번의 경계를 넘는 것은 중죄다. 그는 미국 밀항을 시도했다(24세). 실패했고 자수했다. 감옥에 갇혔다(14개월). 그는 6백 권의 책을 읽었다. 연마의 시기였다. 그는 하기의 감옥에서 『맹자』를 강의했다. 출옥 후 사숙을 열었다(28세, 1857년 11월). 소나무 아래 마을 글방(松下村塾)이 등장했다.

 쇼카손주쿠는 파격이었다. 사무라이 우선의 계급사회 시절이다.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문하생 신분은 다양했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문하생들의 신분 상승 의지로 작동했다. 그 시대 국민적 역량의 발굴과 확대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천한 사무라이(이시가루·足輕)였다.

 경내 ‘지성(至誠)관’에 쇼인의 글씨가 진열돼 있다. 맹자의 가르침(至誠而不動者未之也)이 걸려 있다. ‘지성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쇼인의 ‘지성’은 아베 총리의 좌우명이다. 쇼인은 동기 부여를 중시했다. “능력 차이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장점이 있고 장점이 뻗으면 대성할 수 있다.”

 쇼인은 조슈의 급진 존왕론을 발전시킨다.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으로 내세웠다. “나라는 군(천황)이 지배하며 백성은 군 아래서 평등하다”-. ‘천황 중심의 나라’로 개조하자는 것이다. 그의 막부타도론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다. 그의 사후 그 이론은 국수주의와 엮어져 악성 진화한다.

 

1858년 막부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불평등 조약이었다. 존왕양이파는 반발했다. 쇼인은 분노한다. 거사를 모의한다. 그는 역모에 연루된다. 다시 투옥된다(1858년 12월). 에도 막부로 끌려간다. 그는 암살 음모를 실토한다. 5개월 뒤 처형된다(1859년 10월, 29세). 안세이(安政)대옥(大獄)이다.

 그의 유서는 유혼록(留魂錄)으로 남아 있다. “몸이 무사시 들판에 썩어도 세상에 남겨지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야마토 다마시는 일본제국 죽음의 미학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절망적인 돌격 때 외친 구호다.

 유혼록은 궐기의 언어다. 비장미의 강렬한 주입이다. 제자들을 격동시켰다. 쇼인은 ‘초망굴기’를 외쳤다. 초망은 시골에 숨어 사는 필부를 뜻한다. 쇼인은 “민초의 필부여 일제히 일어서라”고 했다.

 그의 비원(悲願)은 열혈의 동력으로 퍼져갔다. 그의 수제자 네 명(四天王) 중 세 명은 칼에 맞거나 할복한다. 다른 한 명은 막부와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막부 264년 지배가 종료됐다(메이지 유신). 그가 죽은 지 9년 뒤다. 역사소설가 후루카와 가오루(古川薰)는 『유혼록의 세계』를 썼다. 그 책은 아베의 애독서로 알려져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일 근대사 전문가다. 그는 쇼인 학당의 대량 인물 배출 이유를 이렇게 파악한다. “열린 교육의 힘이다. 조슈의 번주는 도쿠가와 막부에 쫓겨났다. 그 원한에다 가난한 하급무사들의 신분 상승 의지, 사명감의 집단적 공유 등이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쇼인은 신화가 된다. 일본 근대사에서 쇼인의 위상과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일본지역학) 세종대 교수는 “쇼인이 구축한 조슈 번의 사상적 토대가 메이지 체제의 근본을 만들었다. 그것이 1945년 패전 때까지 나라의 틀로 작동했다”고 평가했다.

 아베는 지난해 8월 쇼인 신사에 갔다. 참배 후 그는 “중의원 입후보의 뜻을 굳혔을 때도 참배했다.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이태진 교수는 “쇼인은 우경화 국수주의의 원조다. 아베의 쇼인 신사 참배는 야스쿠니(靖國) 참배보다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아베 총리는 쇼인의 세계에 충실하다”고 했다. 그의 역사 도발에 쇼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쇼인의 세계는 아베 역사관에 접목됐다.

 2014년 아베 총리는 ‘강한 일본 되찾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제시했다(신년사). 그 국정 어젠다는 평화헌법체제의 개편이다. 아베의 다짐은 쇼인의 ‘초망굴기’를 떠올린다.

나 는 ‘요시다 쇼인 역사관’으로 들어갔다. 밀랍인형으로 쇼인의 드라마를 꾸몄다. 그의 생애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전시물이 눈길을 잡는다. ‘야마구치현 출신 총리대신들’이다.

 한쪽에 이토와 야마가타가 있다. 반대편 밀랍인형은 다섯. 가쓰라 다로(桂太郞),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가쓰라·데라우치·다나카는 조슈 군벌의 핵심이다. 쇼인 문하(門下)의 영향권에 있다. 쇼인의 영향력은 전율스럽다.

 아베까지 합해 야마구치 출신 총리는 8명(하기 고향 4명)이다. 전체 행정구역(47개 都·道·府·縣) 중 가장 많다. 역대 일본 총리는 57명(96대)이다. 관광 안내서는 “일본 역사의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재상”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움찔했다. 그들은 한국과 악연과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태평양전쟁 후 총리는 기시와 사토다. 둘은 친형제다. 사토 총리 시절 한·일 신시대(1965년 국교정상화)를 열었다. 쇼인 역사관에 기시의 글씨가 걸려 있다. 쇼인이 읊은 시다. 그 글씨는 쇼인 비석(東送之碑, 萩往還공원)에 새겨져 있다. 아베는 기시의 외손자다. 기시의 정치는 아베의 롤 모델이다. 기시의 글씨, 사토의 유신 기념 글씨, 아베의 쇼인 신사 참배-. 쇼인의 그림자는 길고 짙다.

 야마구치 출신 거물들과의 악연은 한국 침탈이다. 이토(초대 조선통감)와 야마가타는 그 원조 격이다. 한·일 강제병합 때(1910년) 총리는 가쓰라,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3대 통감)이다. 그들은 메이지 시대 원훈(元勳)으로 꼽힌다. 우리 망국사의 원흉(元兇)이다. 조슈의 성취는 나에게 미움과 허탈로 다가온다.

 조슈 인맥은 한반도 장악에 대거 등장한다.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조슈 출신이다. 조선 주재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이토의 하기 친구다.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슈의 육군 중장 출신이다. 그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도자다.

 정한론(征韓論)은 쇼인의 외정(外征) 구상이다. 그의 저서 『유수록(幽囚錄)』에 담겨 있다. 첫 감옥살이 때(25세) 쓴 책이다.

 “홋카이도를 개척, 오키나와(당시 琉球)를 일본 땅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북으로 만주 점령, 남으로 대만, 필리핀 루손 일대를 노획한다.” “열강과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를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쇼인의 한국 경멸은 오만과 야욕이다.

 쇼인의 외정론은 『일본서기』에서 출발한다. 신공(神功) 황후의 삼한 정벌, 임나(任那)일본부를 담고 있다. 왜곡과 과장, 허구와 가설들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심취했다.

  그의 외정론은 국가 어젠다가 된다. 제국주의 팽창과 침략의 이론이다. 대동아공영론으로 확장된다. 조슈의 후학들은 쇼인의 구상을 실천한다. 정한론을 기획, 음모했다. 조슈는 한반도 유린의 기지가 된다.

 정한론은 일본의 지정학적 본능이다. 쇼인의 작품만이 아니다. 임진왜란은 정한론의 실패한 시도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는 그 시대 계몽 사상가다. 그의 탈아론(脫亞論)은 정한론의 아류다. 그 본능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한국의 부국강병뿐이다. 리더십의 비전과 역사적 상상력, 국민의 지혜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기 관광상품은 조선 막사발 … "쇼인을 알아야 일본을 안다"

야마구치 역사는 불편하다. 깊숙이 다가갈수록 불만스럽고 분노로 엮어진다. 조슈는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기구한 인연이 악연이 됐다. 역설로 작용한 세상사다.

 쇼인 신사 이웃에 이토의 옛 집이 있다. 누추하다. 그의 미천한 출신을 짐작하게 한다. 이토의 상(像)이 서 있다. 흙으로 빚었다. 그 옆에 도쿄에서 살던 집도 옮겨져 있다. 그 집에 유물·사진이 간략하게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1909년)로 죽을 때까지 기록물이다.

 그 시대 이토를 능가했던 인물은 많았다. 대란의 비극은 요절과 횡사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67)는 도사(土佐)번 출신이다(지금의 고치현). 료마는 막부 타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삿초(薩長·사쓰마+조슈) 동맹을 맺게 했다. 료마는 암살당한다.

 유신 삼걸도 쓰러졌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와 오쿠보는 사쓰마 출신이다. 1877~78년 서남전쟁패배·자결(사이고), 자객 암살(오쿠보), 병사(기도)로 퇴장한다.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太郞)는 일본 육군의 기초를 닦았다. 오무라도 조슈 출신이다. 칼에 맞는다.

 이토는 그 공백을 차지한다. 권력 독주의 행운이다. 사이고 죽음 뒤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쓰마가 장악한다. 야마가타는 조슈 군벌 시대를 열었다. 야마가타는 오래 살았다(84세). 군부와 내각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하 기는 100년 전 그대로라고 한다. 막부 시대 고지도가 통용된다. 성 밑 거리 조카마치(城下町)는 거의 바뀌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키(萩燒)는 대표적 관광상품이다. 하기에서 구워지는 조선 막사발이다. 그 유래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이다.

 쇼인과 하기 감상은 이중적이다. 흥미와 반감의 연속이다. 쇼인의 정교한 교육이 뇌리에 박힌다. ‘비이장목(飛耳長目·하늘 높이 귀를 열고 멀리 들어라)-. 그는 제자들에게 정보 마인드를 주입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가 정보를 공유했다. 공유된 정보는 부가가치를 높인다. 정보는 대란의 시기를 선점하게 했다. 갑오년 동북아시아는 그때처럼 요동친다. 정보는 힘이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쇼인과 야마구치는 일본 근대사의 원류다. 아베가 주도하는 국수주의 우익 해부의 바탕이다. 역사의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절실하다. 진실과 논리에 익숙해야한다. 경계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과 친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진정한 우호의 기반이다.

일본 야마구치현=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그리고.. 관련 보도내용에는 일왕 생일에 관련된 내용도 없습니다... 취재차 가서 축하하고 먹고 나온 거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이죠.

 

취재차 갔다고 하는데.. 그걸 믿는 이들은 적을 것 같고요.. 아마 청문회에서 역사관에 대해 집중 공격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뭐.. 윤 정권의 인사들은 친일 인사들인가... 생각을 하게 되네요..이러다 일본에게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거 아닌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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