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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정치

일본 자객도 살리고 역사 왜곡까지 도왔다 / 시사저널 2009.9.8

by 체커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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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046 

 

일본 자객도 살리고 역사 왜곡까지 도왔다 - 시사저널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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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자백한 조선인 이주회의 실체 드러나

▲ (큰 사진)용산 서룡사 국사대의 이주회 비석 제막식에 참석한 흑룡회 단원들. (오른쪽 아래)서룡사 국사대에 안장된 이주회의 묘. ⓒ시사저널 임영무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황후의 거처인 건천궁에 난입했다. 이어서 궁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는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된 후 시신은 불에 태워 버려졌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 자객들은 모두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린 일본 법정은 ‘증거 불충분’을 들어 이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일국의 국모를 죽인 일본 자객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애국지사’로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일본 자객들은 어떻게 해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일까.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조선에서는 이와 관련해 세 명의 조선인이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에 고용되었던 평민 박선(당시 26세)과 한성부 친위대 부위 윤석우(당시 40세) 그리고 한성부 군부협판 이주회(당시 52세)가 그들이었다. 1895년 11월13일의 대한제국 관보를 보면 고등재판소는 이날 세 명에게 모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1월19일에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박선과 윤석우는 죽는 순간까지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눈물로 통곡했으나, 이주회는 “내가 황후를 살해했다”라고 끝까지 진범임을 주장했다.

순종대에 이르러 윤석우와 박선은 모반 혐의를 벗고 사면 복권되었다. 둘은 명성황후 사건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진범은 일본 자객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바로 ‘이주회’였다. 일본 자객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에서 진범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주회는 왜 명성황후를 살해한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일까. 그는 누구이며 이 사건에 얼마나 관련되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시사저널>은 명성황후 살해 1백14주년을 앞두고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이주회’라는 인물을 집중 추적했다.

지난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은 ‘친일파 99인’ 이주회 편(강창일 배재대 교수·현 민주당 의원 지음)을 보면 그는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 오위장에 올랐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대원군의 심복이 된다. 그리고 연일현감으로 승진했고, 외무위원 벼슬까지 탄탄대로를 걷는다. 이주회는 김옥균, 우범선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5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는 3년 동안 도쿄에서 머무르며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면되자 전남 순천 앞바다에 있는 금오도에 정착해 개간 사업을 벌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주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학군을 토벌하려 일본 전함 스쿠바가 순천에 들어오자 이주회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된다. 이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박영호 내무대신을 통해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가담한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은 “이주회는 명성황후가 죽어야 나라가 살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확신범이었다. 이주회는 또 명성황후 사건에 개입한 조선인들의 총책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이주회’라는 인물에 대해 숨기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재조명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이주회는 일본 우익 세력이자 폭력 조직인 흑룡회가 보낸 첩자였다. 1885년 갑신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 그는 흑룡회 단원이 된다. 흑룡회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들이 속한 조직이다. 따라서 이주회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사실상 일본 자객들과 같은 조직원이었던 것이다. 흑룡회는 이주회를 조선 군부에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조선 대신들에게 천거하거나 압력을 넣었고, 군부 협판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잠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주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왼쪽)대한제국 관보에 실린 이주회 재판 판결문. (오른쪽)모반 혐의를 적용해 ‘교수형’을 선고한 기록이 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일본 우익단체, ‘영웅’ 대우에 추도 법회까지

이주회와 흑룡회의 관계는 그가 처형당한 후에 더욱 명확해진다. 1895년 11월19일에 처형된 이주회의 시신은 산속에 버려졌다. 그의 처와 아들(병구, 당시 7세)은 서울을 빠져나왔고, 나중에 아들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한일병합이 되자 송병준의 사위이자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이주회의 처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뒤를 봐주었다. 조선총독부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역인 미우라를 중심으로 우익 단체(흑룡회)가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흑룡회 간부들과 단원들은 대거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 사찰 서룡사 국사대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산속에 버려졌던 이주회의 유골을 수습해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추도 법회를 열었다.

<시사저널>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동아선각지사기전>에는 당시 서룡사 국사대에 이주회의 묘를 안장할 때 일본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대거 참석한 사진이 실려 있다. 현재 서룡사는 흔적이 없이 사라졌으며, 이주회 묘의 행방도 묘연하다. 이주회가 처형된 후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해마다 흑룡회 주도로 이주회에 대한 추도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주회는 ‘의인’이자 ‘영웅’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흑룡회의 맥을 잇고 있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자객 중 한 명인 고바야카 히데오는 ‘민후 조락 사건’이라는 수기를 비밀리에 남겼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조선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조선의 국모를 죽인 것은 조선인이다’라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 수기를 발견한 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고바야카가 쓴 수기를 번역해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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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시사저널의 보도입니다. 중간에 어떤 이름이 나오는데.. 박선이라는 이름이 나오죠..

이에.. 블로그에선 이 박선이라는 사람에 대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람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관련링크 : 윤치호 - 민비 찔러 죽인놈 박선(朴銑)

3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한국사료총서 번역서3)>1895년(조선 개국 504년, 고종 32년, 을미년)> 12월>30일(음력15일) 《월요일》 맑았으나 추웠음.

그들은 지난밤에 단발을 하지 않았다. 내각은 단발령을 강행할 만큼 강력한 것도 아니고 그럴 만큼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대원군이 어제 밤 웨베르와 논의한 비밀협상이 알려지자 이용원이 부리나케 달아났다고 한다.

어제 관보 호외에서는 박선(朴銑)·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가 10월 8일 사건과 관련해 12월 28일자로 사형을 언도받았음을 공표했다.

사형언도는 다음과 같은 범죄혐의(?)를 근거로 내려졌다.

1. 단발하고 외국인 복장을 해 일본인으로 가장한 박선은 혐의를 받던 인물이었다. 10월 8일 새벽에 폭도들 틈에 끼여 일본인들과 광화문으로 쳐 들어갈 때 홍계훈(洪啓熏)이 문 앞에 서서 그를(또는 그들을) 반역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박선은 홍계훈의 팔을 검으로 내려쳤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장 왕후폐하의 거처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왕후의 머리채를 잡고 섬돌계단으로 왕후를 끌고 나오면서 왕후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시신을 검은 천에 싼 다음 그 위에 석유를 쏟아 붓고 불을 질렀다.

2. 이주회는 10월 8일 새벽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가 곧장 장안당(長安堂)으로 가서 왕태자와 왕태자비를 위험에서 구출한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첫 자백에서 그는 궁중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마자 사복을 입은 채 광화문으로 갔지만 문이 닫혀있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가 영추문으로 갔을 때 거기에 경비병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궁중의 여러 문들을 자기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날 아침의 사태를 주의 깊게 고려해보면, 장박(張博)은 그 음모의 전모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여겨진다. 폭도들이 각문에 경비병을 두지 않고 내버려둘 만큼 부주의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또한 그의 두 번째 자백에서 그가 신거문(辰居門)에서 군인 폭도들의 손에 잡혀 절박한 위험 속에 있던 궁중의 노비 10명 또는 그 이상을 보고 소리를 치고 해치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노비들을 내버려둔 채 달아났다고 말한다. 이런 증언은 이주회가 폭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무슨 재주로 그가 손짓 하나와 명령 한마디만으로 그 폭도들을 통제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의 세 번째 자백에서 그는 병사들이 자신의 지시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래서 적어도 외관상으로나마 자신이 반란에 관련되었다는 것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을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3. 윤석우는 상급자인 이두황·이범래(李範來)·남만리(南萬里) 등의 명령에 따라 자기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태화궁(太和宮)을 경비했다. 거기서 그는 춘생문(春生門)을 거쳐 강녕전(康寧殿) 마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병사들을 사방으로 분산 배치했다. 광화문과 건춘문(建春門) 주변을 순찰하던 도중 그는 녹산(鹿山)이라고 하는 작은 동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시신 한 구가 불태워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살펴본 결과 그것이 궁녀의 시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왕후폐하가 탈출할 시간이 없었으며 궁중에서 다른 여성은 아무도 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는 자기가 동산 근처에서 불타는 것을 보았던 그 시신이 왕후폐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 그는 우범선과 이두황의 허락을 얻어 불탄 유해의 하체부분을 수습해 오운각(午雲閣)의 서봉(西峰) 아래에 묻었다. 윤석우는 그날 밤(새벽)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의심을 살만한 부분이 많다. 더욱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그 신성한 유해를 감히 옮겨놓은 일은 매우 부적절하고 무례한 행동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세 명의 피고에 대해 교수형을 언도한다.” 내가 지난 신문을 통해서 살펴보건대 이주회와 윤석우은 사형을 받을 만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만일 장박과 왕후 시해 일당들이 그렇게 얄팍한 술수로 세상을 속이려 한다면 그들은 잘못 판단한 것이다. 오후 7시 반부터 빈튼 박사(Dr. Vinton)와 아름다운 그의 아내와 함께 유쾌한 저녁을 보냈다. 박사가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파치시의 코넌드럼”(Conundrums of Parchisee) 등의 놀이를 했다. 

윤치호의 글을 인용해서 박선(朴銑)·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 이 3명이 교수형으로 선고한 것을 두고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판단한듯 싶은데.. 윤치호의 마지막 글을 보면.. 이주회, 윤석우는 윤치호가 판단하기에는 사형을 받을만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언급합니다.. 

 

이글을 링크를 한 다른 블로그에선..

 

참고링크 : 민비 시해자 박선사건 결말

윤치호 글하고 똑같은데 박선이 죽였다고 궁중 증인들이 많이 있다가 추가되어있다. 그러나 교살형 당한후 다음 년도 6월달을 보면 박선은 모함당했다고 쓰여있다. 어차피 대원군 파에서 민비를 죽여달라고 요청했고 조선인 훈련대 및 조선인 가담자가 일본인 보다 더 많았다니하니, 누가 죽였는지 크게 의미는 없어 보인다. 누가 피니쉬를 날렸는지는 박선이 아니라면 누군지는 모르겠다. 모함을 했다해도 일본인이 했다고 하면 끝날일인데 그러나 증인들이 많고 분명하게 박선이라고 단언 했으니 박선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아무죄없는 박선을 처형했다면 조선 조정이 등신일 뿐이다.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6월 27일 양력 2번째기사 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 이승구가 역적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전 경무사(前警務使) 허진(許璡)은 유길준·조중응(趙重應)과 비밀 음모를 짜고 일개 무지한 박선(朴銑)을 꾸며내어 가지고 모함하여 범죄 사건을 얽어서는 더없이 중대한 징토하는 일로 서둘러 결속함으로써 저들의 죄악을 덮어버리고 몸을 뺄 꿍꿍이를 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한 그의 무도한 죄상은 다들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11월 14일 경술 2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5년 죄인 박선, 이주회, 윤석우 등의 모반사건에 대한 판결 선고문 판결 선고문(判決宣告文) 【피고인 박선(朴銑), 이주회(李周會), 윤석우(尹錫禹) 등의 모반 사건에 대하여 검사(檢事)의 공소(公訴)에 의하여 심리하였다. 피고 박선은 본래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을 하고는 일본 사람이라고 거짓말하여 행색이 수상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사변 때에 피고가 일본 사람과 함께 반란 무리들 속에 섞여 광화문(光化門)으로 돌입할 때 홍계훈(洪啓薰)이 문을 막고 역적이라고 소리치자 검(劍)으로 그의 팔을 치고는 곧바로 전각(殿閣)의 방실(房室)에 이르러 왕후(王后)의 처소에 달려들었다. 손으로 달비채를 휘어잡고 마루 끝까지 끌고 가서는 검으로 가슴을 찌른 후에 검은 빛깔의 천으로 말아서 석유를 붓고는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시역(弑逆)한 절차를 손으로 형용하는 것이 뚜렷하다는 김소사(金召史)의 고발에 의하여 피고를 잡아다 신문했더니, 피고는 줄곧 거부하였지만 궁중 인원들의 많은 눈을 가리기 어렵고 증인들이 분명하게 단언(斷言)하였다. 피고 이주회는 이해 8월 20일 새벽에 일어난 사변 때에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와 장안당(長安堂)에 곧바로 이르러서는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와 왕태자비 전하(王太子妃殿下)를 보호하고 즉시 물러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피고의 첫 공술에서 총소리가 대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갑자기 듣고 평상시의 옷차림으로 광화문으로 향하니 굳게 닫혔으므로 영추문으로 옮겨가서 들어갔는데, 병정(兵丁)의 파수가 적연(寂然)하고 여러 합문(閤門)에도 단속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변란의 원인을 깊이 따져보건대 소동을 일으킨 무리들의 일처리와 계획을 한 것이 이처럼 허술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두 번째 공술에서는 대궐 안으로 돌입할 때 신거문(辰居門)에 이르니 무예 별감(武藝別監) 10여 명이 변란을 일으킨 군사들의 핍박을 당하여 늘어선 총구멍 아래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마침 보고는 고함을 치면서 손을 흔들었더니 그들이 무예 별감들을 즉시 놓아주고 다른 곳으로 흩어져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 무리들이 마구 날뛰는 그 마당에서 피고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서 한 번의 손짓과 한 번의 호령으로 흉악한 무리들을 이처럼 쉽사리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그 이유를 따져보면 흉악한 무리와 결탁된 진상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공술에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피고의 호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흩어져 간 것은 일이 공교롭게 꼬여서 공모한 흔적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때라고 자복하였다. 피고 윤석우는 이해 8월 20일 오전 4시에 대대장(大隊長) 이두황(李斗璜)과 중대장(中大將) 이범래(李範來), 남만리(南萬里)의 야간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이끌고 동별영(東別營)으로 출발하여 태화궁(太和宮)에 가서 지키다가 춘생문(春生門)으로 들어가서 강녕전(康寧殿) 뜰에 이르러 병정을 각 곳에 파견해 보내고는 광화문(光化門)과 건춘문(建春門)을 순찰하던 중 녹산(鹿山) 아래에 이르자 시체 하나가 불타는 것을 보고 하사(下士) 이만성(李萬成)에게 자세히 물었더니 나인(內人)의 시체를 태운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인 21일에 궁중에서 떠도는 말을 듣건대 그날 밤 변란 때 중궁 폐하가 옮겨갈 겨를이 없었고 궁녀 중에도 피해당한 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녹산의 연기 나던 곳은 결국 구의산(九疑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에 대대장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에게 청하고 불타다 남은 시체에서 하체만 거두어서 오운각(五雲閣) 서쪽 봉우리 아래에 몰래 묻어버렸다고 하였다. 피고가 그날 밤에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간 것이 비록 장수의 명령대로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진상이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울 뿐더러 녹산 아래의 시체를 피고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 더없이 중하고 존엄한 시체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대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은 스스로 크게 공경스럽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이다. 이상 피고들의 범죄 사실은 피고들의 각각의 공술과 김소사의 고발, 대질(對質) 공술, 이갑순(李甲淳)·김명제(金明濟)·이민굉(李敏宏)의 공술을 증거로 하여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반에 관한 법조문에 적용시켜 피고 박선, 이주회, 윤석우를 모두 교형(絞刑)에 처한다.】

3명중 박선은 아무 죄없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언론사 보도내용을 보면.. 3명의 조선인중.. 윤석우와 박선은 모반혐의를 벗고 복권됩니다.. 그리고 이주회를 주목하죠..

일본 우익 세력이자 폭력 조직인 흑룡회가 보낸 첩자

이주회가 일본 흑룡회가 보낸 첩자라는 판단을 언론사가 합니다.. 근거로 한일병합 이후.. 일본 흑룡회는 이주회의 가족과 자손을 돌보는 것으로.. 이주회와 일본 흑룡회와 관계가 있었다는 걸 근거로 듭니다..

 

즉.. 일본의 사주로.. 이주회가 첩자로서 대한제국에 갔고.. 명성황후 시해에 관여를 했으며.. 그외 박선과 윤석우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이 없고.. 결국 일본의 계략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까지 불태워졌다는 결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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