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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논란거리/정치

국힘 태영호, 4·3위령비에 무릎 꿇고 한다는 말이 "北 김일성 지시"

by 체커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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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2일)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 위령비에 참배하는 태영호 의원(태 의원 SNS 갈무리)

국민의힘 태영호 국회의원이 제주4·3이 북한의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주장해 논란을 사고 있습니다.

태 의원이 주장한 맥락의 소위 '제주4·3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사장된 주장입니다.

태영호 국회의원(강남 갑)은 오늘(13일) 보도자료를 내고 "제주 4·3 사건, 명백히 北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제(12일)부터 국민의힘 전당대회 일정으로 제주를 찾은 태 의원은 이날 첫 일정으로 제주 호국원을 찾아 참배하고, 이후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해 분향했습니다.

태 의원은 4·3평화공원에서 "4·3사건은 명백히 김씨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주장하며,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다시금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됐다"며 "이같은 비극이 없도록 자유 통일대한민국을 이루기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자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시발점으로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태 의원의 주장한 제주4·3 북한 지시설 내지 지령설은 이미 4·3계에서 힘을 잃고 사장된 주장입니다.

극우보수단체 등은 이 같은 주장을 하며, 그 근거로 지난 1983년 출간된 『박헌영』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책은 남로당 지하총책 출신 박갑동 씨가 저술한 책으로, 1970년대 그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들을 엮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언론 취재에 의해 책의 작가 박갑동 씨가 직접 이와 관련한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난 1990년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당시 박갑동 씨와 직접 인터뷰를 하고, 박 씨로부터 해당 내용이 '내 글이 아니고 당시 정보부에서 고쳐 쓴 것'이라는 내용의 증언을 확보한 바 있습니다.

4·3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 중 한 명인 미국의 존 메릴 박사 역시 '4·3 북한 지령설'에 관해 근거가 없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태 의원이 이날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은 "제주4·3 발발 시기와 김일성의 활동 시기만 확인해도 이런 어이없는 주장을 펼치진 않았을 것"이라며 "공인이 표를 얻기 위해 이런 구태의연한 발언을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김 회장은 "지금도 4·3을 이념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이 어이가 없다"며 "우리나라로 월남한 이후 집권여당 국회의원으로서 근거 없고 검증되지 않은 발언을 함부로 내뱉었다. 집권 여당에서 태 의원에 대해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4·3희생자유족회는 현재 공식 입장을 준비하는 한편, 향후 이번 태 의원의 발언에 대한 강력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도 태 의원의 발언에 대해 강력 성토하며 조만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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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제주도를 방문했었나 봅니다. 관련해서 페이스북에 글이 올라왔군요.

4.3사건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이 지시에 의해 촉발된 사건이라는 발언... 이 내용 때문에 4.3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실왜곡이기 때문이란 입장이군요.

 

4.3사건..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당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이승만 정권에서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참고링크 : 4.3사건 - 나무위키

 

정의된 내용을 보면..

 

참고링크 :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개정 2022. 1. 11.>

1. “제주4ㆍ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도민을 학살한 이들중에 좌익세력은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당이 될 겁니다. 그럼 여기서 끝이냐.. 아닙니다. 우익세력중에 가해자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서북청년단입니다. 

밤에는 인민 유격대나 좌익들이 나타나서 마을 주민들이 괴뢰군과 괴뢰 경찰에 붙어먹었다며 인민 재판을 열어서 죽이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나타나 의심스러운 징후가 보인다면서 민간인을 처형했다.

밤에는 좌익세력에게.. 낮에는 국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번갈아가며 민간인들을 학살.. 처형을 했으니... 단순히 한쪽 때문에 잘못했다 할 수는 없고.. 관련해서 우익쪽 가해자들은 전부 어떠한 처벌을 받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들이 많죠..

 

그리고.. 4.3사건이 발생하기 전.. 발단이 있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이 제주도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리고 가두행진 중에.. 기마경찰이 아이를 실수로 죽이게 되었지만 그냥 가버렸고..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가해자에 대해 돌팔매질등을 하는등.. 난장판이 되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군중들에게 발포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당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 기회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바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주도 경찰이 만들어준 셈이 됩니다.. 이걸 언급하는 이들은 없는 것 같더군요.

 

이후 남조선 노동당은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이때 제주도민들이 호응하기도 했습니다.. 민관합동파업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승만 정권은 이런 이들을 모두 싸잡아 좌파라 몰아갔고.. 미군정도 탄압하여 총파업을 와해시킬려 했습니다.

 

그래서.. 총파업은 결국 와해가 되긴 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파업참여자들에 대한 검거를 하고.. 검거된 이들은 모진 고문도 당했다고 합니다.. 총파업이 와해가 되었음에도 계속되는 우익의 백색테러가 지속적으로 발생한 상태.. 결국 남조선 노동당이 반란을 일으키게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된 셈이 됩니다.. 이후는 4.3사건의 진행이 되는군요.

일단.. 태영호 의원이 비판을 받는 부분은.. 이 4.3사건에 대해 김일성 지시로 촉발되었다는 발언.. 이것 때문인데.. 

 

정작 그 말을 한 박갑동씨에 대해 언론사 취재등을 해보니..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 답을 했었고.. 중앙 지령설은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글이라고 답을 해서.. 김일성 지시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는게 확인이 된 상태입니다.

 

즉.. 지금으로선 허위사실이 되는 것이죠..

 

참고뉴스 : '4·3=빨갱이' 근원 '공산폭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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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25> '공산폭동론' 추적기 ①

1949년 4월 1일자 미군 보고서. 밑줄 친 부분이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적고 있다. 출처 : 제민일보(http://www.jemin.com)

소련·북한 지원 주장 … 초토화작전 빌미
미군보고서 뒤늦게 "북한 지원 증거 없다"


'공산폭동론' 추적기 ①
4·3취재반이 증언 채록과정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토벌대에게 피해를 입은 유족들은 '폭도 가족', '빨갱이 가족'이란 누명을 벗겨달라고 호소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연좌제의 사슬에 시달리고 있었다. 
 
1999년 황상익 교수(서울대 의과대학)는 이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논문을 발표했다. '의학사(醫學史)적 측면에서 본 4·3'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황 교수는 "4·3은 우리 모두를 억압하고 병들게 해온 한국사회의 병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러기에 4·3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고 결론지었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주목한 것은 '빨갱이'와 '문둥이'의 어의를 비교한 대목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마다 나병환자란 뜻인 '문둥이'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그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둥이는 '나병'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빨갱이'는 실체조차 없는 말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문둥이보다도 훨씬 파괴적이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협박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4·3과 '빨갱이' 논리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과거 군사정권이 4·3은 북한 정권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아래 발생한 공산폭동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규정 하나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반세기 가까이 4·3에 대해 침묵하도록 강제한 금기의 벽도 바로 여기에 터 잡고 쌓여졌다.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는 4·3 체험자들의 증언 기피현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문제는 제주도민만이 겪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 한때 '현대사 연구 기피증'이 있었던 것도, 언론에서 이 문제를 외면해 온 것도 바로 그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4·3취재반은 이렇게 우리를 옥죄는 '4·3 공산폭동론'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해보기로 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조사해 봤더니 4·3 발발 초기 공산폭동론을 처음 주창한 사람은 토벌대의 총수 격인 군정장관 딘 소장과 조병옥 경무부장이었다.

딘 장군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1948년 '5·5 최고수뇌 회의' 직후에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과 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총수인 조병옥 경무부장은 그해 6월 한술 더 떠 제주사태를 "조선의 소련연방화 내지 위성국화를 기도하는 공산당의 남조선 파괴공작에 가담한 자들의 총선거 방해공작"이라고 규정했다.

두 사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못했다. 대신 당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이 유고록에 남긴 "미군정은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짓기로 했다"는 증언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다.

초토화작전 감행 직전인 1948년 10월에는 '괴선박 출현설'로 전국이 들썩였다. 10월 8일자 미군 정보보고서는 "제주 근해에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잠수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중앙지들은 이를 근거로 북한 선박이 출현한 것처럼 보도했다. 이런 정보는 강경 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사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1949년 4월 1일자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은 앞의 정보들을 근간으로 제주도를 싹쓸이해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입을 씻어버린 격이다.

이렇게 심층취재를 통해 '공산폭동론'의 진원지가 하나하나 허물어지자 위기를 느낀 보수 논객들은 '박갑동의 기록'을 들이대며 반격의 기회로 삼았다. 박갑동은 그의 저술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제주4·3폭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박갑동은 한때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 그런 그의 경력 때문에 이 주장은 매우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졌다. 4·3취재반은 곧바로 박갑동의 주장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참고뉴스 : "중앙지령설 내가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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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동 "정보기관이 고쳐서 쓴 글" 고백
백선엽 장군 "4·3은 黨 말단 자의적 행동"

'공산폭동론' 추적기 ②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의 "중앙당 폭동지령이 있었다"는 글은 1973년 「중앙일보」의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처음 다뤄졌다. 1983년에는 「박헌영」이란 책자로 출간됐다.


박갑동이 쓴 책을 보면서 4·3취재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자에는 단 2쪽에 4·3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짧은 글에서 일곱 군데나 왜곡된 부분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중앙당의 폭동지령'뿐만 아니라, '4월 3일 감찰청과 제주경찰서의 기습점령',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 푸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의 현지 파견', '조노구(趙魯九) 등장' 등 기존의 잘못된 자료들을 짜깁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그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갔다.

거처를 수소문했더니 그는 일본 도쿄에 살고 있었다. 주소를 알아낸 4·3취재반은 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그의 저술 내용과 우리 취재반의 조사 내용이 다른 비교 분석표를 보내고, 답신을 요구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4·3취재반은 김종민 기자를 일본에 파견했다. 박갑동은 직접 만나주지는 않았다. 대신 전화 인터뷰를 통해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했다. 그는 "그 당시 남로당의 노선은 전면적인 비합법 무력투쟁 단계가 아니"라면서 제주도당의 돌출성을 상기시키고, "「박헌영」이란 책은 정말 부끄러운 글"이라고 인정했다.

이 충격적인 인터뷰 내용은 「제민일보」 1990년 6월 28일자에 보도됐다. 이에 당황한 것은 그동안 박갑동의 글을 재생산하면서 공산폭동론을 펴오던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다. 한 보수 논객은 박갑동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한 뒤 "왜 그런 인터뷰에 응했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필자가 박갑동을 직접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들은 것이다.

 육사졸업생」을 쓴 장창국 장군의 회고록이나 박갑동의 사례에서 보듯, 현대사 관련 신문 회고물에서도 왜곡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신문에 연재할 때 회고 당사자의 구술과 기존의 자료들을 짜깁기해 기자들이 재작성하기 때문이다. 민감한 부분은 정보기관에서 개입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4·3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백선엽 장군(육군 대장 예편)이 「한국일보」에 '실록 지리산' 연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연재의 핵심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나, 그 배경이 되는 4·3을 다룰 것은 불 보듯 훤했다. 특히, 백선엽 장군은 1948년 4월 3일 국방경비대 제3여단 참모장(중령)으로 예하부대인 제9연대를 방문한 뒤 제주읍내에 머물다 사태를 만났다. 곧이어 통위부(육군본부의 전신) 정보국장을 맡아 4·3 사태를 진압한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4·3 성격 규명에 매우 중요했다.

나는 예방 차원에서 1990년 12월 백 장군에게 서신과 함께 우리의 조사 자료를 보냈다. 신문 연재물과 김익렬 유고, 존 메릴과 박갑동 인터뷰 기사 등이었다. 이런 노력이 주효했던지 백 장군은 「실록 지리산」(1992년에 책자로 발간됨)에 4·3에 관해 37쪽이나 기술하면서 양쪽 주장을 용해해내는 등 신중한 표현을 사용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을 언급하면서 "군정 당국이나 경찰이 사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민심이 이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거나, 4·3 초기 경비대가 미온적 대응을 한 것은 "이 사건을 경찰·서청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 폭발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던 속마음이 반영된 결과였는지 모른다"고 표현한 것 등이 그 예다.

특히 그는 민감한 사항의 하나인 남로당 중앙 지령설을 부인했다. 김점곤 장군의 말을 인용,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정리했다. 백 장군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의견도 피력했다.

"나는 최근 제주도내에서 일고 있는 '4·3 조명'과 '4·3 치유'의 노력을 우려와 기대 속에서 보고 있다. 우려는 어느 쪽이고 상대방의 과오만을 과장하는 노력들이 가져올 결과적인 또 한번의 대립에 대한 것이다. 반면 기대는 활발한 증거 수집과 폭넓은 상황 조명을 통해 당시의 사태 전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처를 서로 싸매고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 성숙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허위사실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선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도 보수진영에선.. 특히 극우세력들이 아직도 4.3사건에 관련되어 북한의 지령으로 촉발된 사건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근거가 박갑동씨의 중앙일보 기고글을 근거로 하는데.. 이미 관련해서 그 글을 쓴 사람도.. 4.3사건에 관련된 인물중 한명인 지금은 고인이 된 백선엽씨도 부인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니.. 관련글에 대해 해명을 하며.. 사실이 아닌 부분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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